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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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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03. 2020

나는 오늘 새로 태어났다.

깨끗하다. 맑다 투명하다.  한여름, 소나기가 퍼붓고 난 후의 쾌청한 날씨처럼 시야가 훤하다.

한강을 지나오면서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울이란 곳에 처음 온 촌닭처럼 창밖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기하다. 지금껏  뿌연 황토먼지 속 풍경만 바라보다가 오늘 이 깨끗한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지금껏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았던 걸까? 마흔 살 이후의 나는 사물의 반쪽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어제오늘 이틀간  눈 수술을  받았다. 내 눈은 심한 백내장과 황반 근시와 난시. 노안까지 겹친 고물 안구가 되어있었다. 인 잘못 만나서 고생만 하다가 어제 그리고 오늘 영원히 퇴출당한 나의 수정체에게 안할 따름이다.


40대 중반쯤 갑자기 시력이 약해졌다. 일종의 직업병이겠지 생각하며 근시 안경을 썼다. 해가 갈수록 안경의 수를 점점 늘려가다가 돋보기까지 쓰게 되자 불편함이 따랐다. 다초점 렌즈로 바꾸었지만 시력은 자꾸만 떨어지고 급기야 사방이 희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백내장 초기였던 것 같다. 나는 미세먼지 때문에 누구나 나처럼 희뿌연 풍경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많이 미세먼지를 내뿜는 환경을 원망했고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맑았던 하늘을 그리워했다.


며칠 전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방금 눈 시술을 마쳤는데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다고 한다. 아마 안경 쓴 친구들에게는 모두 전화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만족도가 높았던가 보다.


갑자기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이 무거워 보였다. 컴퓨터 자판을 보고 글자를 친다기보다 어느덧 익숙해진 손끝의 감각으로 자판을 누르다 보니 오자도 많이 생긴다. 안경을 쓰고도 사물은 번져 보여서 자꾸만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르다고 했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병원에서 접수한 바로 그날 오른쪽 눈을 수술했다. 일명 노안 수술이라고 부르는 안과 시술이다. 다초점 인공수정체를 삽입하여 백내장과 근시 원시를 모두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수술 후 눈에 안약을 넣기 위해서 붕대를 살짝 들추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비뚤게 그린 내 눈썹이 맨 먼저 눈에 뜨이고 내 얼굴의 땀구멍을 처음으로 보았다.  다시 젊어진 내가  나이 든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뿌연 유리창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바라본 풍경은 어제와 다르다.

내가 못 보고 지나친 게 또 뭐가 있을까,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는 말.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이다.


지막  왼쪽 눈의 붕대를 마저 풀고 오는 길,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던 세월로 거슬러 간 기분이다.

나는 지금 막 태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껏 나는 불투명한 색과 빛, 형태를 보면서 내가 전에 본 것을 추측이나 느낌으로 다 안다고 생각하고 말했었다. 맑아진 눈을 통해 여과 없이 투시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겸손해졌다.


눈이 흐렸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름다운 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몰랐던 내 얼굴의 주름살. 남편 얼굴의 보이지 않던 점, 집안 구석구석 내 손이 미치지 못했던 곳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다시 젊어진 눈 때문에 몸이 힘들게 생겼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이 더 크다.



기념품으로 한 개쯤 남겨둘까 하다가 그동안 내 몸의 일부였던 안경들을 모조리 버렸다. 도수를 넣은 선글라스 다초점 안경  돋보기들..., 한순간에 변심한 나를 보고 지금껏 내 분신이었던 것들은 아마 나를 모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경과의 이별은 그동안의 무거운 빚을 다 갚은 채무자의 마음처럼 가볍고 시원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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