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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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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Feb 23. 2021

철새도 텃새도 다 자기들 사는 방식이 있다



아, 사진을 찍지 못했네..., 한강변으로 라이딩을 나갔다가 하늘 위로 정확히 시옷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철새 무리를 보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며 질서 있게 날아가는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아차! 순간의 포착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달렸다. 공원에서 잠깐 쉬는 중에 주변으로 비둘기 떼가 몰려온다. 누군가 먹이를 뿌려준 듯 익숙하게 쪼아 먹고 있다. 출발하려고 일어섰는데도 피하기는커녕 아랑곳하지 않고 모이만 쪼아 먹고 있는 비둘기에게 남편이 말을 던진다.


''비켜라. 이놈들아, 너희들도 저 철새 좀 닮아봐라''


맛있게 브런치를 먹다가 졸지에 철새들과 비교를 당한 비둘기들, 나라도 비둘기 편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둬요 생긴 대로 살게''


비둘기도 철새도 다 자기들 삶의 방식이 있다.


남이 뿌려준 먹이를 주워 먹는 새비둘기뿐 만이 아니다.

참새는 가을들판에서 잘 익은 곡식을 쪼아 먹어 농가에 피해를 주는 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새보다는 비둘기를  성가신 새로 본다.

몸집이 큰 놈들이 잘 날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닭둘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들의 배설물이 세균을 옮긴다고 하여 쥐둘기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몸집이 크기로는 까치도 만만치 않지만 어찌 비둘기에 대해서만 유독 성화인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변에 제비가 많았었다. 제비는 봄을 알리는 철새였다. 가을에 강남으로 갔던 제비가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왔고 전봇줄 위에 제비들이 줄지어 앉아있는 모습이 도심 속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풍경이었다. 한 여름 소나기라도 내리려고 하면 제비들이 낮게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제비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그 흔한 제비를 볼 수 없게 될 줄 몰랐다. 농촌의 과다한 농약사용과 도심의 환경 쓰레기들이 제비를 더 이상 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사람이 철새의 발길을 끊게 한 것이다.


제비가 사라진 곳을 비둘기가 차지했다. 그날의 제비만큼이나 비둘기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새다. 하지만 비둘기는 제비만큼 사랑받지 못한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올림픽의 전야제에서는 수많은 비둘기들을 하늘에 날렸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환호하였다. 그 이전에는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하여 통신수단으로 활용되었던 새였다. 비둘기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하느님의 대홍수가 끝난 줄 모르고 있던 노아에게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어다 준 비둘기, 홍수가 끝나고 육지가 드러났음을 알리는 새로운 소식의 전령사였다.


이렇게 인간과 가까이 지내면서 인간을 이롭게 한 새였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비둘기에 대한 대우가 급하락 하였다.  

그 이유는 이젠 더 이상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새들보다 번식력이 강한 데다 큰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고 많이 먹다 보니 배설물도 상당하다. 급기야 유해조류로 지정되어서 어디서나 골칫거리 새로 낙인찍혔다.

사람에 의해서 길들여지던 새가 사람들에 의해서 퇴치되어야 할 새가 되고 말았다.


참 알 수 없다. 누구는 먹이를 뿌려 주고 누구는 비둘기 퇴치법을 알린다. 88년 올림픽 때 하늘로 올려 보낸 수많은 비둘기들. 그 경이로운 함성이 지금은 비둘기 해를 알리는 항의로 바뀌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로 갑자기 개체수를 늘려 놓고 이제 와서 번식력 운운한다.


공원에서 한 무리 비둘기들을 보았다. 그들이 공략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 먹다가 떨어뜨린 김밥이었다. 서로 더 많이 쪼아 먹으려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주머니 안에 그들에게 던져 줄 먹이가 없는 게 미안했다. 나 또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작은 동정심으로 비둘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 쓴 글에서 읽었던 것 같다. 너무 주기만 하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먹이를 던져주는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비둘기에게도 책임은 있지만 사람들의 가벼운 연민이 비둘기들에게 시대착오를 갖게 하였다.


황조롱이나 매에게 잡힐 염려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 미움 같은 것이야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도심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비닐 끈에 발이 묶여 절뚝거려도 살이 쪄서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어도 쉽게 살 수 있는 삶을 택한 비둘기들, 참 의미 없는 삶이다.


오래전 여행을 하던 중에 때를 놓쳐 허기져 들어간 식당에서 먹을만한 메뉴를 찾지 못했다. 아무거나 시켰는데 정말 아무 맛도 아닌 음식이 나왔다. 배가 고팠는지라 꾸역꾸역 먹었다. 배는 채워졌지만 한 끼 식사에 대한 의미가 사라졌다.

의미 없는 삶이란 누군가 던져준 음식을 받아먹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게 누구든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거두지 않으면 수많은 비둘기들은 어떻게 될까? 길들여지는 삶이 아니라 아마 자신들도 살기 위해 사냥을 하겠지?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높은 나뭇가지에는 이들이 김밥을 놓고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산비둘기들이 있다. 

집 비둘기와 달리 산비둘기는 몸이 날렵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는다.

사람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원의 비둘기들도 이처럼 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버려지는 일도 없었을 것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고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게 그들의 삶을 지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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