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로 채워진 캐리어가 점점 비워져 가지만 우리 가방의 무게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덜어진 만큼 채워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비누는 이곳 프로방스의 특산품이다. 프로방스의 대부분 가게마다 각각 다른 모양과 향기를 지닌 마르세유 비누가 진열되어 있다.
나는 TV 홈쇼핑에서 마르세유 비누를 처음 알게 되었다. 쇼핑 호스트가 물을 묻힌 손으로 비누를 문지르면 거품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얼굴을 씻은 뒤 피부를 확대시켜 보여 준 화면에는 세안 전과 세안 후가 확실히 달라져 보였다. 때 마침 어린 외손녀가 태어났을 때라 순수 천연 비누라는 말에 선뜻 주문을 했다.
TV의 광고가 과장광고 만은 아니었던 것은 그 비누를 사용하는 동안에 화장실 안에 맴도는 좋은 향기가 있었다.
이곳 프로방스에서는 마르세유 비누가 도처에 널려 있다,
니스의 구 도시에 있는 시장에서 비누를 구입했다.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마르세유 비누는 다섯 개를 사면 한 개를 더 준다고 한다. 상술에 혹해 무려 한 개의 무게가 400그램이나 되는 비누를 샀다.
칸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앙티브에 들렀다. 앙티브의 시장은 볼거리가 많았다. 가까운 스페인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조형물과 술, 장식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시장 입구 좌판에 중년의 여인이 비누를 팔고 있었다. 입고 있는 앞치마와 투박하고 굵은 손마디가 마치 "이 비누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직접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역시 자신이 만든 비누라고 한다. 식당에서 주인에게 이 집 음식 맛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지만 그래도 왠지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니 더 믿음이 갔다.
올리브기름으로 만든 연두색 비누를 두 세트 구입했다. 한 세트에는 비누가 각각 세 개씩 들어 있었다.
드디어 비누의 본고장 마르세유에 왔다. 14세기 후반에 이곳에 비누공장이 만들어지고 루이 14세가 이곳에서 만든 비누를 공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세유 비누는 왕의 비누였다가 지금은 비누의 제왕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만든 비누에는 모두 ‘사봉 드 마르세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누의 색깔에 따라 사용한 기름의 종류도 다르다.
종려 기름으로 만든 것은 베이지 색을 띠고 있고 올리브기름으로 만든 것은 은은한 연두색빛깔이다. 그밖에 꽃가루를 첨가하여 보라 분홍 노랑 등, 다양한 색깔의 비누가 있지만 무슨 색깔이든 천연 식물성 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몸을 씻기거나 옷을 세탁할 때는 마르세유 비누를 즐겨 사용한다고 한다.
마르세유 구 항구로 가는 길목에는 비가 와도 젖지 않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기다란 회랑이 있고 회랑 안의 가게에서는 거의가 비누를 팔고 있었다. 비누의 본고장답게 갖가지 비누 조형물을 비롯하여 형형색색 아기자기한 비누들이 즐비하다. 나는 이곳에서 '사봉 드 마르세유'가 뚜렷하게 찍힌 비누를 구입했다. 향기가 좋아서, 색깔이 예뻐서, 비누의 본고장이니까,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다양한 이유를 들어 구입한 비누의 무게가 꽤 무거웠다.
"비누 장사할 껴?"
지금까지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던 남편이 드디어 볼멘소리를 하였다. 살림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니 못 들은 척한다.
아직 라벤더 꽃이 피지 않은 세낭크 수도원은 라벤더 꽃향기보다 더 진한 향기가 기념품 샵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의 수사들이 직접 기르고 말려서 제품으로 만든 향수와 비누, 화장품들이 향기의 주인공들이다.
마르세유 비누는 올리브기름이나 코프라 기름 종려 기름 등 천연 식물성 기름이 72퍼센트가 함유되었다고 하는데 왠지 이곳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만든 비누는 그 비율을 정확하게 지켰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비누의 향기가 지금까지 내가 산 비누와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좀 더 부드럽다고 할까, 시장에서 구입한 비누가 알코올처럼 진하고 금방 사라지는 향기였다면 이곳에서 파는 비누는 은은하면서도 잔잔하게 오래도록 남는 향기가 있다.
남편도 내 후각의 느낌에 동조하였다. 그것은 천천히 구입했더라면 이곳에서 맘에 드는 비누를 샀을 텐데 덜 좋은 상품을 미리 구입했다는 핀잔이 은근히 들어 있는 동조였다.
격이 다른 향기와 만든 이들의 신뢰감이 또다시 내 지갑을 열게 하였다.
비누가 처음 만들어지고 나서 인간의 수명이 평균 20년이 늘었다고 한다. 비누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우수한 건강제품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누는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을뿐더러 어차피 사서 써야 할 물건이라면 조금 힘들어도 가져가는 게 옳다..
"비누는 썩지 않아 단지 조금 굳을 뿐이지"
굳는 건 비누뿐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남편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
사탕가게 앞에 선 아이처럼 나는 이 비누들 앞에서 흥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