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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01. 2021

우리들의 섬

여행은 언제 어디를 누구와 함께 갔느냐에  따라 감흥이 다르다. 똑같은 장소라 해도 매번 그 느낌이 다른 것은 그때의 기후가 다르고 내가 처한 환경이 다르고 함께 동행한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그랬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내가 바라보는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달랐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언제나 여행이라는 설렘을 안고 찾은 곳이기에 항상 긍정의 장소였던 제주도는 언제  찾아가 봐도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 있는 섬인 것만은 확실하다.


 맨 처음 제주도를 가게  된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다. 목포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서였다.

수 십 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지독한 뱃멀미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글을 쓰면서 방금 드는 생각은 그때 친구들의 예쁜 모습만 사진으로 남길 일이 아니라 뱃전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남겼더라면  지금쯤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의도된 아름다움보다 조금 민망하더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정스럽 때문이다.


소녀들은 감귤나무와 커다란 야자나무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고 뱃멀미로 잃었던 생기는 곧 되찾았다.

선생님은 뭐든 아시아에서 최고라든지, 세계에서도 드문이라는 말을 서두에 넣어가며 우리들을  용두암과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만장굴로 인솔하셨고 그런 선생님의 말씀과는 아랑곳없이 소녀들은 바람과 여자와 돌이 많다는 삼다도에 해맑은 웃음소리를 추가하였다.


성산 일출봉 정상 분화구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있다. 소녀들의 눈길이 한 곳에 머물렀다.

 드넓은 풀밭 위에서 딩사진을 찍는  쌍의 신랑 신부, 바람에 날리는 신부의 하얀 웨딩드레스를 바라보는 소녀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였다.


수학여행 이후 7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성산일출봉에서 꾸었던 소녀의 꿈이 조금은 실현된

셈이었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11월  제주의 날씨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만 왠지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해녀가 금방 바다에서  잡아 온 살아있는 문어다리를 신랑은 징그러워서 먹을 수 없다 하고 신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먹었더랬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천방지축인 어린아이들과 여행을 계획한 것조차 무모한 짓이었다.

지금아이들과 떠난 그때의 여행은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용머리 바위에서 작은 아이가 왜 그렇게 울었을까? 그 까닭을 몰라서 허둥댔던 기억밖에는, 그래도 제주도가 좋았던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제주여행은 한라산 겨울 등반 여행이었다.


그 해 한라산의 모든 나무들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온통 하얀 배경 앞사람이 걸어 간 발자국을 따라가는 등반일뿐이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주었다.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정상 아래 진달래밭까지 가는 동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감사하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백록담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을 한순간에 낚아채 가버린 바람, 순식간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폭풍이 몰아쳤다. 콩알만 한 우박을 동반한 바람은 사정없이 을 때리고 사람들은 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순간에 바뀌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처음 경험하는 기상이변이다. 구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백록담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은 지루하고 길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조차도 억으로 남는 제주도다.


그 후로 친구들끼리, 가족과 함께, 또는 모임의 어떤 명분으로든 자주 제주도를 찾았다. 그때마다 제주도는 조금변해가 있었다. 전에 없던  아파트가 보이고  바닷가에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비어있던 학교가 갤러리가 되고 아름답게 꾸민 공원이 늘어났다. 

어떻게 변했건 제주도는  때와 달리 돌아갈 때는 더욱 돈독한 정을 쌓게 해주는 신비의 섬이다.


이번 여행은 그동안의 제주도 여행과는 달랐다.  흰머리가 희끗한 남편들이 모두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신비한 섬은 육지에서의 연륜과 세월을 잊게 하고 시간을 되돌려 그들이 처음 만난 그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2인 1실이 아니어도 좋았다. 수학여행처럼 친구들끼리 함께 묵으며 수다를 떨 수 있는 방.

부인들은 창문 밖으로 넓은 청무 밭 뷰가 보이는 2층을,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질 남자들은 주방이 딸린 1층을 사용했다.

아침이면 우아하게 조식을 먹는 재미로 호텔에서 묵기를 좋아했던 젊었을 적 취향과 달리  부엌이 딸린 집에서 늦으막에 일어나 남편들의 해장국을 끓이면서도 즐거웠다.

아침산책을 하다 발견한 냉이가 다음날 해장국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제주는 다시 젊어진 우리들 부부를 위해 아낌없이 주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면서 수고한 보상인 듯 싱싱한 방어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내어주었고 너른 귤밭에서 원 없이 귤을 따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도 해 주었다.

돌담에 수북이 쌓아둔 파지 귤은 나눔의 미덕을, 갈밭과 청무 밭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에서는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우리들의 가장 젊은 날, 또다시 이곳을 찾아왔을 때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언제 다시 온다 해도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는 그런 곳이니까...


소녀적부터 흰머리 지긋한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제주도는 행복뿐이다. 그곳에는 그때그때의 가장 즐거웠던 추억들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기억할까? 제주도가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파도와 바람에 씻기어 동글동글해진 몽돌같았으면 좋겠다.


보물 같은 추억을 묻고 온 제주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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