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확진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우리 집에서 지내던 손녀가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떠난 오늘 밤, 빈자리가 헛헛하다.
손자 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더라는 말은 천방지축 어린 아기 일 때 하는 말인 듯, 의젓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손녀는 올 때 반갑더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엔 집안이 온통 썰렁하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공기가 다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아이는 집안의 공기를 휘저어 주는 청량제이기도 하다.
2주일 동안을 우리와 함께 보낸 손녀와는 지금껏 중에 가장 긴 시간 살붙이고 지낸 기간이었다.
새로 돋은 연초록 잎들이 생동감을 주는 것처럼 아이가 온 후 , 우리 집은 생기 넘치는 봄날의 연속이다.
이 작은 소녀의 동선에 따라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새싹이 돋고.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를 부르는 소리, 피아노를 치는 소리, 매일 같은 시간에 울리는 대문 앞 종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봄 들판을 적셔주는 시냇물 소리와도 같다.
이 아이가 즈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쯤, 나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쳤다.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 후 대장에서 혹이 발견되었고 아무 일도 아닐 거라는 바람과 달리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 악성종양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담당 의사에게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과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새로 태어날 아이와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것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캄캄하고 막막했던 지난날이 한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잊혀 가고 있다는 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솟아나는 엔도르핀이 내 몸의 나쁜 것을 소멸시켰는지 더 이상 다른 곳에 전이되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품에 안았을 때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완두콩같이 토실한 팔뚝을 만졌을 때의 부드러운 촉감이, 첫발을 떼었을 때의 환희가, 빠진 이 사이로 헛바람이 세는 말을 하는 아이를 바라볼 때의 귀여운 모습이,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터진다.
내 아이를 기를 때는 채 장착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미소를 내가 갖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 사이 벚꽃이 지고 있다. 봄이면 꽃구경을 하러 오는 행락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벚꽃 성지가 우리 동네에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동네산으로 산책을 갔다.
내 눈길은 꽃이 아닌 아이들에게로 자꾸만 간다. 세 살 남짓 되었을 아기에서부터 초등학생과 중학생들까지 모두 선생님들과 함께 야외학습을 나온 듯했다. 그중에서도 어린이 집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가장 많이 띈다. 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행여라도 무리에서 이탈될까 봐 열심히 선생님을 따라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들, 엄마 아빠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도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적응 중이다. 그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여 한참을 바라본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밝음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아이를 보며 꽃을 바라볼 때의 미소가 번진다. 손녀가 저만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손녀의 모습이 나의 늙음보다 빠르다는 걸 느낀다. 통틀어 아이가 한 명인 우리 집에서는 곧 아이의 모습 대신 사춘기 소녀가 출현할 것이다.
내가 꽃을 기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의 꽃이 사라지는 게 아니듯이 혹여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주변의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자. 온유한 마음이 얼굴에 미소로 나타나면 나도 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