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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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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Apr 20. 2023

꼴찌라서 행복해요

우리집 거실 한쪽벽엔 나에게 기쁨을 주는 눈금이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손마디 하나씩 늘어나는 눈금을 보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어서  자라거라 쑥쑥 크거라'


어느 집이나 아이들이 있는 집에는 아이의 키를 재는 키재기 기구가 있다. 나는 거실  옆 목이 긴 기린 그림을 그려놓고 이곳에서 외갓집에 놀러오는 손녀의 키를 잰다. 기린의 기다란 다리와 몸통을 지나 지금은 목덜미까지 아이의 키를 잰 기록이 있다.

두어 달에 한번, 혹은 그보다 더 자주, 아이를 그곳에 세워두고 나는 손녀아이의 키를 다. 어린 나무가 자라서 거목이 될 때까지의 기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손녀가 세 살이 되던 해, 처음 문지방 옆에 세워두고 재기 시작한 눈금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금을 채워나가더니  드디어 오늘 의미있는 눈금의 숫자를  넘어섰다.


기록이란 소중하다. 기록되지 않고 형체만 남아 있는 것들은 '추측할 뿐'이라는 애매한 말로 신뢰감을 떨어뜨린다. 문자든 숫자든 기호든 기록해 놓으면 자칫 공기처럼 사라져 버릴 그 무엇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보다는 과정의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다.


키재기와 함께 그려 둔 기린의 발목즈음에 아이의 키가 닿았을 때 그리고 기린의 꼬리만큼 키가 자랐을 때, 그날의 대화와 그날의 미소, 그날의 행복까지 모두 내 마음속에 간직되었다. 아이의 키가 기린의 엉덩이를 지나 허리쯤에 이르는 동안 나이 든 이의 희망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내 늙음이 헛되지 않는 건 자라는 너를 곁에서 바라볼 수 있기때문이다.


문지방 옆에 그러진 키재기 눈금은 이제 가느다란 줄 긋기가 아니라 아이에서 소녀가 되는 과정을 그린 한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꼴찌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처음 키를 재는 날 아이가 말했다.


"나도 할머니처럼 키가 크는거야? "


오늘은 아이가 내키를 살짝 넘어선  날이다, 이제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키가 작은 행복한 꼴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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