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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일 만의 외출

by 연희동 김작가

일요일 아침, 옷장문을 열고 남편이 입을 옷을 고른다. 옷을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설렌다. 나야 뭐 늘 입던 대로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면 되지만 남편은 오늘이 여섯 달 만에 갖는 첫 외출이다.


어떤 옷을 준비할까... 나와 깔맞춤으로 청바지를 가져갈까? 아냐 아무래도 간편한 츄리닝이 나을 거야, 그래도 오랜만에 갖는 야외 데이트인데 츄리닝 차림일 수 없지, 공원도 가고 카페도 가서 오래된 연인처럼 커피도 마시고 싶은데...


남편이 즐겨 입던 면바지를 골랐다. 티셔쓰와 재킷 그리고 평소에 늘 애장 하던 모자를 챙기는 동안 내 입에서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야~


"네? 외출이 안된다고요?"


이럴 수가...

분명 어제는 외출이 될 거라고 했다. 남편의 현재상태는 외출이 가능하나 단 주치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간호실에서 미처 결재를 받아두지 못한 듯하다. 들떠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실망하는 내 모습이 안되어 보였든지 병원 아래층의 라운지는 다녀와도 된다고 한다.


밖은 전형적인 봄날씨다. 어제 그제 봄비가 내린 후 벚꽃은 모두 졌지만 어디 봄꽃이 벚꽃뿐인가, 조팝나무가 하얀 꽃송이를 수북이 매달고 있고 라일락도 철쭉도 지금이 한창이다. 봄날의 불청객인 황사도 비구름과 함께 사라지고 투명한 하늘,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데이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


병원 라운지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공원이다. 우리는 저 길을 건너가자는데 서로 의기투합하였다. 병실에는 간병인이 쉬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줄 것이다. 졸지에 규칙을 위반하고 땡땡이를 치는 불량환자가 되었으나 나름 스릴 있는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다


환자복 위에 재킷을 입고 모자를 쓴 남편, 비록 휠체어에 앉아서 하는 외출이지만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휠체어 운전을 처음 해보는 나에게 첫 주행치고는 무척 안정적이라며 치하도 아끼지 않는다.


꽃향기. 풀냄새, 옷깃을 스치는 바람, 새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파란 잔디 위에서 뛰어노는 강아지들.... 생동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참 감사하였다.


지난겨울 동안 막막했던 시간들은 되짚어보기도 싫지만 우리는 내내 그날을 떠올리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를 잃은 줄 알았는데 더 큰 것을 얻은 기분이다.


우리의 데이트는 완벽했다. 공원의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의 재롱을 바라보며 함께 웃다가 다음에 지인들이 병문안을 오면 좁은 병실이 아닌 이곳 공원에서 만나면 좋겠다며 적당한 벤치도 물색해 두었다.


계절의 순환과 함께 남편의 병도 변화가 왔다.

대학병원에서 이곳 재활병원으로 이송해 올 때만 해도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풍경은 온통 꽁꽁 얼어있는 모습이었다. 겨울나무들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바라보며 남편은 앙상한 몸에 링거를 꽂고 누워있었다.

봄이 되어 나무들이 가지에 새 순을 틔우면서 남편의 신경도 차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편의 몸에 연결되었던 기구들을 하나 둘 떼어내고 마지막으로 기관지에 삽입한 목관마저 분리했다. 목관을 떼어낸 자리의 상처에 새 살이 차오르고 남편은 평소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사이 창밖은 온통 벚꽃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벚꽃의 뒤를 이어 이팝나무와 라일락.

철쭉꽃이 만개한 오늘은 그동안 창밖으로만 바라보던 공원으로 첫나들이를 나왔다.


이제 곧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여름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남편은 두 발로 걸어서 이곳에 올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지나간 날을 회상하고 그리워하기보다 다가올 앞날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다.


풍요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꽃들처럼 우리 부부도 한차례 성장통을 겪으며 성숙을 향해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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