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얼굴이 잘 생긴 남자 친구다.
오늘 우연히 짧은 만남을 가진 뒤, 목요일 오후 여섯 시에 바로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로 나는 목요일 오후를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냇가가 있다. 한강으로 가까이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홍제천의 다리 하나를 건너면 동네 이름이 바뀐다. 옛날에는 이곳 냇가에 가재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가재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에는 널찍한 공원이 많고 근사한 산책로가 있어서 나는 옆 동네인 이 아파트 산책로를 가끔씩 들르곤 하였다.
그날도 한강변으로 라이딩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책로를 들렸다.
단지 내 숲 속에는 막 벚꽃이 봉오리를 맺고 있고 시골의 풍경을 코스프레한 원두막과 오솔길 주변으로 민들레와 제비꽃 냉이꽃이 피어있어서 교외로 나온 느낌마저 들었다.
그곳에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아파트에서 마련해 준 한 평 남짓한 텃밭에서 무언가를 심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던지 내가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너희 밭이니?"
"아. 네"
맞다는 건지 아니다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였다. 소년은 내가 빨리 자리를 비켜주기 바라는 눈치였다.
소년이 옮겨 심고 있는 것은 딸기 모종이었다. 작년에 심어 둔 딸기의 줄기가 옆 밭으로 뻗어 남의 밭에서 싹을 틔었는데 그걸 옮겨 심고 있는 중이다. 소년은 이 딸기가 옆 밭에서 심어 놓은 건 줄 아는 모양이다. 나쁜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당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거 원래 너희 꺼야. 딸기는 줄기 번식을 하기 때문에 너희 딸기가 그곳에서 뿌리내린 거야"
"그래요?"
소년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런데 몇 동에 사세요?"
호칭도 지칭도 없이 내가 사는 곳을 물어본다. 그제야 우린 서로 눈을 맞추고 통성명을 했다.
"할머니는 연희동에 살아"
"아 그래요 산 넘어오셨네요?"
나는 다리를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산을 넘어왔다고 한다. 아마 친구들과 우리 동네와 가재울 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동산에 많이 놀러 와 본 모양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여기 왜 오셨어요?"
그제야 할머니라는 호칭을 쓰는 걸로 보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다. 소년은 이곳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고 지금은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비밀은 이곳 텃밭이 사실은 자기네 밭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작년에 누군가 가꾸다가 방치해 놓은 텃밭인 듯하다.
비밀을 공유한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했다.
학원은 여섯 시에 마치는데 집엔 여섯 시 삼십 분 까지 들어가기로 엄마랑 약속했다고 한다. 자기는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지만 사실은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 밭으로 번진 딸기 모종을 모두 옮겨 심었다. 아이의 손도 내 손도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밭을 멋지게 꾸미고 나니 은근히 원래 밭주인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할머니 우리 이곳에 팻말을 붙여 놓을까요?"
"그럼 우리 이름 말고 빈 밭인 줄 알고 가꾸어 놓았어요"라고 적어 놓자고 내가 제안했다. 우리는 마음이 썩 잘 통하는 친구라서 금방 의견이 통일되었다.
소년이 갑자기 흙을 주무르던 손을 털고 서둘기 시작했다. 엄마하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며 마치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리는 백설공주처럼 부랴부랴 이곳을 떠나면서
"110*동, 9*4호"를 기억하라고 소리 질렀다.
아까 소년은 자신의 집 주소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나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른에게 자신의 주소를 말해주는 소년이 염려스러웠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소를 알려 주면 안 된다고 어른답게 타일렀다. 소년은 할머니는 착한 사람이라고 마음의 눈이 알려 주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말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아파트 오솔길로 산책을 갔다. 소년은 만날 수 없었지만 마치 텃밭의 주인처럼 주변을 돌아보곤 하였다.
윌 요일 아침 산책을 하던 중 나는 텃밭이 훼손되어 있는 걸 보았다. 훼손이라기보다 누군가 딸기를 텃밭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심어 놓은 것이다.
일요일에 아이가 나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옮겨 심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꽃이 필텐데 뿌리를 건드려 놔서 꽃이 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목요일 여섯 시, 정확한 시간에 우리는 만났다. 생각대로 딸기를 옮겨 심어놓은 건 소년이었다.
가운데 봉싯하게 흙을 모아놓고 딸기산을 만들었단다.
"딸기산 저 편은 할머니가 사는 연희동이고 이쪽은 내가 사는 가재울이에요"
나는 소년의 말에 감동하고 말았다. 흙을 주무르며 노는 동안에도 소년은 줄곧 나를 생각한 것이다.
우리 집 화분에서 꽃이 맺은 딸기꽃 한 포기를 뽑아 비닐봉지에 담았다. 오늘 산책하는 길에 텃밭에 들려 맨 윗 봉우리에 심어놓을 것이다. 하얗게 핀 딸기꽃을 보고 내 친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 이 나이에도 설렘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