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오월과 유월의 기록입니다-
런던의 남 서부에 위치한 워털루(Waterloo) 역은 영국에서 가장 큰 역인 만큼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워털루라는 이름은 벨기에의 워털루 전장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이긴 기념으로 따 왔다고 한다.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워털루(Waterloo)라는 가사 때문인지 너무나 익숙하게 여겼던 워털루에게 우리는 오늘 혹독하게 당했다..
모든 사건의 시작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조금만 더 부지런했더라면, 아침부터 거하게 영계백숙을 해 먹지만 않았어도, 아니면 누군가 신발을 바꿔신으려고 집 안에 한번 더 들어갔다가 나오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오늘 여행은 순탄했을 것이다.
오늘은 2박 3일 예정으로 스코틀랜드를 가기로 한 날이다. 오월이라고 해도 영국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는 기온이 낮기 때문에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모두들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섰다.
기차여행의 낭만에 들떠있는 철부지 아줌마들에게 미리 예약해 둔 기차 시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슈퍼에 들러 각자 취향에 맞는 간식거리를 고르는 것부터 여행의 즐거움은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를 가려면 워털루 역에서 다시 킹스크로스 역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우리가 있는 뉴 몰든 역에서 킹스크로스 역까지 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이미 예매를 해 둔 스코틀랜드 행 기차 시간에 맞게 가려면 굉장히 빠듯한 시간이었다.
J는 워털루역에서 바로 전철을 갈아타지 못하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다고 했다. 걸어서도 안되고 뛰어야 한다. 자신이 앞에서 무조건 달려갈 테니까 우리들도 뒤를 꼭 따라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차가 워털루 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개찰구를 향해 달렸다.
먼저 J가 빠져나가고 나와 L는 무사히 티켓팅을 하였다. 이제 마지막 남은 Lee만 나오면 우리는 J를 뒤따라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 런. 데....,
Lee의 티켓이 태클을 건다. 티켓을 바르게 집어넣었는데도 개찰구가 열리지 않는다. 시간이 여유만 있다면 서둘지 않고 역무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만 우리는 지금 초를 다투는 사람들이다. 꽉 입 다물고 있는 개찰구 앞에서 당황해하고 있는 Lee를 보고 뒤에 있던 여성 승객이 자기가 티켓을 넣고 나갈 때 곧바로 뒤따라 나오라고 하였다. 다급한 상황인데도 그의 눈짓과 몸짓 하나로 의사전달이 되었다.
여성 승객과 한 몸이 된 Lee가 무사히 나오는 듯싶었는데 덜컹하고 누군가 뒤에서 Ree의 몸을 잡아끌었다. 등에 메고 있던 Lee의 가방이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개찰구 문이 닫히면서 가방은 순식간에 Lee와 분리되어 개찰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 세 명은 힘을 모아 가방 구출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가방을 꿰찬 개찰구는 먹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냥개처럼 더 힘차게 가방을 물고 늘어졌다.
그 사이 J는 우리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뒤늦게야 도착한 역무원 덕에 Lee의 가방은 가까스로 풀려 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리더를 잃어버린 패잔병이 되고 말았다.
워털루역 지휘자가 사라진 군대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되었다. 런던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워털루 역의 철골 지붕이 내려앉는 기분이다.
세 명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다. 외지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는 사람, 우리가 갈 곳은 킹스크로스 역이니 아무튼 그곳으로 가는 전철 게이트를 찾아가자고 하는 사람,
때마침 우리 곁을 지나가던 한인 여학생이 킹스크로스로 가는 게이트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우리의 운명은 점점 어긋나고 있었다. 여학생이 가르쳐 준 게이트는 J가 티켓을 끊기 위해 열심히 달려 간 장소와는 정반대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들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뒤늦게 우리가 뒤쳐진 줄 알게 된 J가 일행을 찾았지만 엉뚱한 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쉽게 나타날 리가 없다.
워털루역 시계탑 아래로 오라는 J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우리는 길에서 아이를 잃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엄마처럼 황당하게 서있는 J 에게로 주춤주춤 다가갈 수 있었다.
방금 일어난 상황을 알 리 없는 J는 세 명의 여인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마치 서로 다른 자기 나라말로 각자 지껄이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들은 쉽게 잊어야 한다. 어쨌든 우리들 네 명은 지금 함께 있고 Ree의 가방도 무사하다.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상황들이 궁금할 뿐, 방금 전의 일은 해프닝으로 마무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지만 스코틀랜드 행 기차는 훨씬 전에 떠난 뒤였다.
스코틀랜드로 가는 기차표는 백지가 되었고 J는 다시 티켓팅을 하기 위해 역무실로 갔다. 우리에게 여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한참 후, J는 손에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입석 기차표를 들고 나타났다. 입석이라도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오늘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지 못하면 이미 휴지가 된 기차요금은 고사하고라도 예약 해 둔 호텔비까지 몽땅 날릴 판인데...,
J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쁜 소식까지 들려주었다.
역무원이 조금 전에 떠난 기차를 타지 못한 이유를 묻더라고 한다. J는 타고난 천진한 눈빛으로 조금 전 워털루 역에서 벌어진 해프닝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리얼리? 너의 친구는 어디 다친 데는 없었어?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역무원은 하마터면 백지가 될 뻔한 우리의 기차표를 그대로 오후 기차표로 바꿔 주었다고 한다.
영국 만세!
이제 워털루는 나폴레옹을 이긴 승전뿐 아니라 오늘 하루, 전쟁과도 같았던 우리의 여행을 승전으로 이끈 기념비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