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은 남쪽 여행

밤도깨비 틈새 여행

by 연희동 김작가

명절 끝은 몸도 마음도 힘들다. 그릇들도 닦아서 제 자리에 정리해야 되고 남은 음식들도 갈무리를 해야 된다. 추석 뒤 설거지가 하늘만큼인데 눈 딱 감고 떠났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새벽 다섯 시.(나는 그때가 한 밤중이었다)

짧은 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언니야 지금 엄마한테 다녀오자''

''못 가''

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또다시 벨이 울렸다.

''나 지금 언니네로 출발한다''

막무가내 여동생을 내가 이길 수는 없다.


새벽 여섯 시, 서해안 고속도로의 상행선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차량행렬..., 추석을 지내고 올라오는 귀성객들의 차량들이 용암처럼 꿈틀거리며 밀려 올라오고 있다.

어제만 해도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하행선의 모습이 바로 저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고향의 풍경이 짙어진다.


며칠 전 태풍에도 끄떡없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마음이 확 트이는 드넓은 벌판...,김제평야의 지평선...,배롱나무의 붉은 꽃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생경하고 아름답다. 정치권 싸움으로 뒤숭숭한 나라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어머니 아버지 저희가 왔어요, 두 분이서 함께 잠드신 산소를 명절 오는 건 오랜만이다. 산소 앞으로 멀리 서해안 바다가 가물하게 보이고 하늘은 유난히 파랗다. 일찍 서둘러 출발해서인지 성묘를 마쳤는데도 아직 정오를 넘지 않았다.




부안 IC 를 지나자 마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서울과 목포로 가는 길이다.

"언니야 우리 남쪽으로 가자"

대답도 하기 전에 동생은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하긴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은 꽉 막혀서 바로 올라간다 해도 밤중에야 도착하게 될 것이다.


''언니야 우리 고창 선운사에 갈까? 지금쯤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을 텐데....'' 하다가 길이 어긋 났다. 주변 경치를 감상하여 호들갑을 떨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순천 장성 노선을 달리고 있었다. 깔깔 웃으며 선운사는 쿨하게 패스.


''언니야 우리 담양에 가서 대숲이나 보고 오자.''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나라는 참 산이 많다.남쪽으로 갈수록 첩첩한 산들이 원근에 따라 흐리고 진하게 보이는 게 마치 물 묻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고속도로 갓길 언덕에 갈대가 활짝 피었다. 억새라고 하던가? 아무튼 갈대가 있어 가을 풍경이 더욱 느껴진다.


여동생의 전화기가 울린다.

''언니야 오빠네 집으로 오란다'''

여동생에게는 오빠이지만 내 바로 아래 동생이 이곳 순천에 살고 있다.

담양이 지척인데 우리는 또다시 쿨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도 순하다는 순천으로 가을여행을 오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종착지는 순천이 아니었다.


''누나 내가 멋있는 곳으로 안내할게''


동생 내외와 함께 송광사를 지나 주암 호수를 끼고 달려서 다다른 곳은 녹차밭으로 유명한 보성이었다. 남쪽 동네는 어느 곳이나 모두 다 국립공원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들, 산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오솔길, 돌다리가 있는 시냇물, 큰돈 들여 해외여행을 뭣하러 간다냐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정감 있는 풍경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푸른 나무 터널을 지나며 감탄을 연발하는 시누이들을 보고 올케가 말한다.


''서울 아지매들은 참 이상하네요, 나는 그게 그것 같은데 뭐가 그리 이쁘다요?''


이쁜데 이유가 있다냐 가을 풀꽃도 이쁘고 고추 밭이랑에 붉은 고추도 이쁘고 오래된 돌담도 이쁘고 저들끼리 뛰어노는 강아지들도 이쁘다야,


정말 좋았다. 풍경도 좋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힘든 일상 속에서 지친 하루를 맞이 하였는데 마치 마술처럼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수북이 쌓아놓은 그릇들도, 신경안정제를 먹이지 않으면 하룻 내 울고 있는 늙은 개도, 남편의 세끼 식사도, 모두 서울에 두고 왔다.


남쪽 동네는 너무나 평온하고 조용해서 이곳에서도 눈만 뜨면 '조국'으로 도배하는 뉴스가 들리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보성은 녹차로 유명하지만 도예는 그보다 더 오랜 역사가 깃든 곳이다. 동생은 자신의 스승인 도예 장인의 가마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도예가 선생님은 도자기들이 즐비한 찬방에서 손수 만든 찻잔에 차를 우려 주었다.


해 질 녘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숲 그늘이 온 집을 다 덮어 버릴 때까지 우리는 차를 마시며 알쓸잡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 고장을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하는 말에 동의한다.


가마 옆에 있는 맛깔스러운 한정식 집에서 차려주는 전라도 음식들....혀가 춤을 춘다.


입구에 들어설 때, 작은 메모를 적어둔 흑판을 보고 이 집 주인장의 성품을 알았다.


''추석 연휴라서 직원들이 휴가를 떠나 집안 식구들끼리 손님을 맞이하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멋을 아는 주인이었다.


집 떠나 온 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 많은 곳을 여행한 기분이다.

고창 선운사에서 상사화를 보며 풍천장어를 먹을 뻔하였고 담양 대나무 숲에서 떡갈비를 먹자고도 하였다.

보성의 한정식 집에는 아쉽게 놓쳐버린 음식들을 다 맛보게 되었다. 한상 가득 준비한 교자상에는 장어 대신 보리굴비와 떡갈비. 녹두묵 오색전과 나물, 맛깔스러운 물김치가 차려져 나왔다. 진홍색 꽈리 나무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보게 될 줄이야...,


''언니야 우리 낼 새벽에 출발 하자''


새벽 세시, 자고 있는 동생네가 깰세라 토끼 걸음으로 세수를 했다. 아...,우리 사랑스러운 올케는 그새 일어나서 준비를 돕는다.

귀성객의 정체가 끝난 새벽길, 경부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려서 무려 세 시간 반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아무리 복잡한 교통체증도 이처럼 틈새가 있기 마련이다.

명절날, 짧고 굵은 밤도깨비 남쪽 여행이었다.

보성의 맛

보성의 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