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국 Sep 25. 2023

잊을 수 없는 그날

뒤돌아 보는 시간


작은 섬마을에 37명의 사망자가 생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사람과 화물을 실은 작은 배가 목적지 항구를 코앞에 두고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침몰된 사고였다. 그날 파도는 점점 세졌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물은 꽁꽁 얼고  눈이 펄펄 내리던 겨울이었다. 침몰사고가 아니어도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사고지역 주변 바닷가에는 현무암이 길게  너들을 이루고 있었다. 주변이 모래사장이거나 자갈밭이거나 몽돌 해변이었다면, 겨울이 아니고 여름이었다면 그만큼 많은 사망자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영을 잘하는 선생님도 제자 둘을 구하고 자신은 살아 나오지 못했으니 수영선수라도 암초에 부딪히면 살아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도  운명인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바위 위에 던져지는 바람에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수라장이  사고현장을 애타게 바라보면서 발만 동동 굴렸다. 악조건 속에서 구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사고가 나기  시간 전에 사고 지점을 지나 집으로 갔다. 다음 날도 그곳을 지나가야 했다. 방학중이었는데 학교를 갔는지 다른 일로 갔는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비극의 현장을 지나다니며 보고 느낀 것만 강하게 남았을 뿐이다. 작은 섬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고였다.


사고가  그곳은  소재지였고 중학교는  동네에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오르막내리막 길을  시간 삼십 분은 걸어야 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왕복  시간을 통학하느라 몸은 녹초가 되었다. 그때는 학교에 사물함도 없었고 요즘처럼 짊어지는 가방도 없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오른손 왼손 바꿔가며 들고 다니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었다. 키에 비해 팔만 길어지는  같았다. 저녁이면 곯아떨어졌다. 그때는 건강한  다리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으니 누구라도  걸어 다녔다. 바람 불지 않으면  먼지  일도 없었고 오염될 매연도 없었다. 사람을 해칠 동물도 없었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다음  사고현장을 지나가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일에 대해선 생각하기도 싫었고 보고 듣기도 싫었다. 특히나 시체를 보게 될까  바닷가 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사고지역에 가기도  자갈밭에는 평소에 없었던 가마니가 쭉쭉 펴져 있었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마음에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자갈밭에는 사망자들을 줄지어 눕혀 놓고 가마니로 덮어 놓았다. 애써 피하려 했던  현장을 직접 보고 말았다. 가마니 밖으로  나와 있었던 푸르죽죽한 다리도 보았다. 심장이 오그라 드는 느낌이었다. 아이고 이일을 어쩌나!


 현장의 오싹한 느낌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다닐 때나 밤에 변소  때는 푸르죽죽한 시체가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괜찮은  꾹꾹 참았지만 어디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귀신이라도 만난  소름이 돋았다. 집안으로 마지막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발뒤꿈치를 잡아당기는 듯한 무서움에 떨어야 했다. 후유!


우리 변소는  외양간  한쪽 귀퉁이에 있었고  뒤편에는 대숲이 있었다. 서걱서걱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도 귀신소리 같았다. 하얀 눈이 쌓여 있었던 자갈밭에 줄지어 있었던 가마니  시체와 푸르뎅뎅하던  다리는 지금도 생각난다. 옛날 사진을 보듯 희미해지긴 했지만 잊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은 육지에서 공부하거나 직장 다니다  명절을 앞두고 고향에 다니러 오는 길에 참변을 당했다. 마을 어른들은  소재지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동네 서로  아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초상집이 되었다.     


그때는 도로도 좋지 않았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도 없었고 자동차는 당연히 없었다. 이동수단은 걷기 아니면 뱃길뿐이었다. 동네마다 항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방파제도 제대로 없었던 때였다. 태풍이나 파도가  때는 배들은 길가까지 최대한 끌어 올려놓고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다. 겨울에는 기상  좋을 때가  많았고 폭풍주의보도 자주 내렸다. 그런 날은 꼼짝  하고 발이 묶였다.


그날도 날씨는 예사롭지 않았고  배를  타면 이동할 방법이 없었기에 너도나도  배에 올랐던 모양이다. 경찰 검문을 마친  많은 사람들이  탔던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배에 짐과 사람을 무리하게 태웠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고향을 찾아 가족들을 만날 꿈에 부풀었던 그들은 꿈도 희망도 이루지 못하고 가마니  장을 이불 삼아 자연의 일부로 사라져 버렸다.  안에는  병원도 없었고  많은 사망자를 안치할 영안실이나 장례식장도 없었다. 이동수단이나 물자도 부족할 때라 하얀 광목 홑이불도 짧은 시간에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거센 바람 앞에 얇은 홑이불이 가당키나 했을까. 어른들의 지혜로운 선택은 가마니가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으로 느낀 그때의 심정은 개죽음보다  푸대접받는 듯한 가마니에 덮인 그들이 불쌍했다. 자녀들과 만남을 애타게 기다렸던 부모의 절절한  마음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희생자가  그들의 죽음과  가족들의 슬픔은 이웃사람들 모두의 슬픔이었다.


희생자를 위한 보상이나 후속조치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 매장할 장소까지 상여를 옮기는 수고는 동네 청년들이 감당했다. 부모와 가족들의 안타까운 마음과 슬픔도  뒤를 따랐다그때 우리 마을 언니도  사람 죽었다. 아버지 친구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 우리 이웃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듣고 보았기에 더욱 쌩쌩한 아픔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주제넘게 신경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