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그 날의 맥주

by 오롯하게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 그나마 ‘맥주’는 내가 대외적으로 ‘술’을 아예 못하지는 않는다는

하나의 명목이 되어주는 고마운 녀석이었다.

사람들에게 ‘술’이라는 존재는 뭐랄까. 슬플 때 마시거나 기쁠 때 마시거나.. 그냥 마시거나??

뭐 별 다른 이유 없이 극도의 긴장감이나 피로를 풀어주는 악마 같은 친구라고 해두자.


그 날은 24시간 동안 가장 많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던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했던 누군가와의 저녁 약속을 앞둔 채 빠담빠담.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아침부터 좋아했던 누군가와의 연락을 이어가며 저녁의 약속을 고대하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누군가를 만나고서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사람의 차가운 마음은 그동안의 설렘과 기대와 희망과 행복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아픔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진 그날 밤. 처음으로 ‘맥주’의 힘을 빌렸다.

시작은 혼자 했지만, 끝은 둘이 함께 맺어야만 할 것 같았고,

맨 정신보다는 약간의 도움을 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랄까.


약속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한 캔과 작은 300원짜리 막대사탕을 가방에 넣고, 그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화 좀 할 수 있어?’ 그러자 그는 ‘그래 집 가면 전화하자'


집에 도착해 초조하게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전화가 지-잉 하고 울리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내 마음을 얘기하고, 그의 마음을 듣고 그렇게 한 시간이 흘러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게 미안하다고 수 도 없이 말하고,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우리들의 시간들에 대해 여러 번 미안하다고 말하고, 앞으로의 보일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해 또 여러 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되뇌다가 그렇게 나는 그와 시작 없는 끝을 맺었다.


그 날의 맥주는 뜨거웠고, 참 고마웠다.


아마도 나는 두근거리는 내 마음 뒤에 숨어있던 잔인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진작에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한 마음에 대해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고 피나는 상처를 예쁜 대일밴드로 꼭꼭 눌러 감추고 있으려 했던 나의 행동들을 그 사람의 눈빛과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만하라고, 이제 그만 인정하라는 듯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 같다. 스스로를 상처 냈던 나는 그런 그의 친절한 손길이 너무나도 싫었고, 연인이 아닌 그저 친한 오빠 동생으로 지내려던 그의 불편한 노력을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외면했다. 그와 나를 잇고 있던 기-인 줄을 잘라내고 줄을 이루고 있던 몇 가닥의 실을 쌍둥 쌍둥 가위로 잘라내고, 그 실을 이루고 있던

작은 먼지들까지 모두 쓸어 담아 버리고 나니 나는 이제야 그가 나에게 건네었던 친절했던 그 손길이 나를 위해서였음을. 이제야 조금 알겠더라.


시원한 냉장고 혹은 차가운 냉동실에 잠시 몸을 뉘어있던 맥주를 꺼내 치-익! 하는 소리부터 마음을 뻥 뚫리게 해주는 맥주.

분명 편의점 냉장대에 있던 시원한 캔맥주를 아주 시원하게 따서 마셨음에도 나에게 그날의 맥주는 너무나도 뜨거웠다. 나에게 수 도 없이 미안하다고 했던 그 사람의 말 때문이었는지,

우리의 관계를 망쳐버린 내가 그 사람에게 건네었던 사과의 말 때문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 날의 맥주는 한참 동안이나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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