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11살

by 오롯하게

“와, 진짜 이게 얼마만이냐.”


20년전 초중고를 모두 보낸 동네를 오랜만에 다시 찾아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생각이 나서?

어?


“저기.. 혹시 서진철..아니야?”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임이 분명했다.

나 혼자서 초등학교 3년을 짝사랑한 서진철.


“어? 임진아? 대박. 너.. 여기살아 아직?”


중학교까지 같이가서 무려 같은 반배정까지 받았지만

서울로 전학을 간 탓에 짝사랑은 강제로 종료되었다.


“아니 나 여기 안살지. 그냥 생각나서 와봤더니 너를 보네. 진짜 신기하다. 너는 여기 왠일이야?

너야말로 여기 안살지않아?”

“나는 서울 살다가 판교로 이사갔어. 그냥 할 것도 없고, 나도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왔어. 진짜 웃긴다.

그냥와서 면도도 안하고 이러고 나왔는데.”

“그러니까. 그것도 어떻게 딱 우리학교에 동시에 있어? 너무 신기해.”


거의 20년이 지나고 본 그의 모습에서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무려 3년을 짝사랑하던

그 앳되고 천진난만한 남자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면도도 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여전히 따뜻하고 멋있었다.

우리 학교에서 여전히 제일 큰 은행나무 그늘아래 앉아, 이제는 같이 쓴 커피를 마시며 각자 살아온 인생얘기를 했다. 지나간 나의 짝사랑 얘기도.


“근데 너 그거 알아?”

“뭐?”

“4학년때 너랑 나랑 처음 짝됐을 때 있잖아.“

”니가 맨날 선 넘지말라고 필통으로 벽쌓고, 그때?“

”응 그때. 나 너 좋아해서 그랬던거야.“


지나간 사랑에 대한 고백도 고백인데, 아무렇지않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진짜 어른이 됐나, 했다.


”에?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그때 말하는거 맞지?“

”좋아하는거 티내기 싫으니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더라. 그리고 니가 그때 앞자리 지수 좋아해서 뭐, 심통도 났고.“

”엥? 아니야. 나도 그때 너 좋아했어.“


이건 무슨,


”나를 좋아했다고?“

”그래. 그래서 니가 나한테 못되게 굴때마다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렸는줄 아냐. 11살 그 어린 소년의 가슴을 말이야.”


20년이 지난 그의 지나간 사랑고백을 듣는데, 갑자기 멀쩡했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더라..아마 너랑 떨어져서 중학교 가고도, 그러고도 한참을 좋아했지. 너를.“

”…그렇게 한참을…?“

”웃기지. 맨날 툴툴대던 니가 뭐가 좋다고.”


갑작스런 고백에 새삼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아 괜시리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래서, 만나는 사람은 있어?”

가슴이 뛴다. 아무렇지 않은듯


“아니, 일만 하다보니까 연애는 통 관심이 안가더라. 너는?“

”나도 뭐. 일이 한참 재밌을 나이라.“


의도치 않은 정적이 흐르고,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나는

”그만 일어나자. 슬슬 더워진다.“

”그래.“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차로 가는 내내 우리 둘 사이의 공기는

점점 더 어색해져만 갔다.


”진짜 반가웠다. 잘가고!“

”너도. 아 근데,“

막 차에 오르려던 그 때


”다음주 주말에는 뭐해? 바빠?“

”…다음주 주말..?“

”밥먹고 영화보고 음.. 커피도 마시자.“

”…?“

”데이트신청 그거 하는거야 나.“


더위때문인지 20년만에 만난 첫사랑의 고백때문인지

벌겋게 붉어진 얼굴에 내가 할 수 있는건 웃는 일 뿐이었다.


”그래, 하자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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