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도 없이 우리에게 나타났던 한 이름의 당신이
다시 당신의 이름을 내려놓고 고요히 사라짐에
먹먹한 슬픔이 드리워 집니다.
어떤 삶은 지루하도록 평평하고
또 어떤 삶은 지독하게 가파른데에 비해
당신의 삶은 아마도 은근하게 평평하고 가파르다가도
더 나아갈 곳 없는 절벽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누구 하나 당신의 옷자락을 잡아주지 못해 기어코 이름을 놓아버린 당신에게
무참히도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내가 나의 이름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어느 순간에
당신이 잡아준 내 해진 옷자락으로 또 다시 그 이름을 붙잡고 나는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도, 쪽팔린것도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행복할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듯 결국 남을 위로하던 당신에게
그 한마디 해주지 못하여 미안하고 또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절벽 끝에 외롭게 서있던 당신을 잡아 주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한 선택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가슴이 날카롭게 찢기고, 벌써부터 보고싶고 또 그립고,
온 마음이 물 속에 잠긴 듯 먹먹하고 차오르는건 눈물 뿐이라지만 이제는 자유로워졌을, 편안하고 따뜻할 당신의 영혼을 기쁘게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가파른 삶의 시간을 평평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준 당신에게,
이름 없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