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일

이름 없는 당신에게

by 오롯하게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를 그럴듯하게 모른 척하는 일이 잦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나를 잊진 않았나요.


백통이 넘는 편지를 당신께 보냈지만

이렇게 마음이 멀어진 채 당신께 글을 적는 건

거의 처음인 듯합니다.

마음이 멀어졌다는 건 비단 당신에게뿐만은 아니고요,

세상 그리고 내가 마음을 주던 모든 것들에게서

잠시 문을 닫고 나 혼자 고립된 기분입니다.

딱 이 말이 지금 내 마음인 듯합니다.


내가 나와 멀어진다니,

참 아이러니한 말이지요.

내가 나인데,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있는듯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들과 멀어지고 싶습니다.

당신과 세상과, 나에게서.


그렇게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내가 마음을 주던 모든 것들을 모른 채하는 중입니다.

누군가의 의도가 전혀 묻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이 아주 작고 하찮은,

추운 겨울에 쌓인 눈덩이 속에 묻힌 오래된 민들레 꽃씨같이

아무런 의미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런 것이라도

그런 것들에게서도 상처를 받는 나를

외면하고 모른 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구태여 이런 나의 마음을 전하는 이유는

당신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으니까요.

한 겨울 먹먹한 바다 같은,

묵념하듯 조용한 밤하늘 달빛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누군가 같은.

그래서 모든 것을 터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존재였으니까요.


열심히 세상과 마주했던 만큼

이번엔 조금 오랫동안 모른 척하려 합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아마도

조금 더 모른 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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