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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Oct 17. 2016

무탈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불안

불안전한 일상에 대한 불안

무탄한 생활들이 이어지면 글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걱정이 줄어들고 고민도 사라지려 흔적만을 남겨놓거나 조금이라도 입꼬리가 올라갈라치면,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펜을 잡을라치면 언제나 그렇듯 글이 써지지 않는다. 마음이 편할 때 글도 좀 잘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마음이 좋지 않고 숱한 걱정들에 둘러싸여, 떨어질 생각조차 없는 고민들에 파묻혀 있을 때만큼 글이 잘 써지는 순간도 없다. 머리 위에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소나기 아래에서 비를 막으려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할 때 부스러져 나오는 부스러기들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연애하는 동안의 찬란하다 생각했던 순간들에는
단 한 글자도 써지지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연애하는 동안의 찬란하다 생각했던 순간들에는 단 한 글자도 써지지 않는다. 아니 쓰지 못했다. 오롯이 연애 상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도무지 펜을 잡을 시간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마음에 드는 글들은 이별의 징조가 보이는 순간부터 눈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막 나온다. 비를 잔뜩 머금고 있던 시커먼 구름이 우르르쾅쾅. 번쩍이는 번개들과 함께 쏟아져내린다. 그러면 이별이고 나발이고 그 보석들을 주워 담기 바쁜데 그러다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나. 이별을 한 사람이 맞나 싶다가도 쏟아지는 그 달디 단 비가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 해서 고민과 걱정덩어리로 가득한 시간들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비들을 온몸으로 맞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그럴 때 걸리는 감기는 아주 정말 끔찍이도 지독하다. 자칫하면 우울함 속에 스스로를 내팽개치기도 한다. 이런 순간은 나에게 딱 한번 왔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2013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그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이한 느낌의 일러스트였는데, 그림에 색이라고는 까맣고 조금 흐린 회색빛이나 흰색 그리고 빨간색뿐이었다. 나 스스로가 어떤 감정인지도 잘 몰랐던 그 시기에 그 일러스트만 보면 토닥토닥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이는 그 그림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좋았고 멋지다 생각했다. 

2013년 당시에 한 동아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모여서 스터디를 한 후에 밤샘 뒤풀이를 가지곤 했는데 그 어느 토요일 뒤풀이에서 내가 자랑하듯 그 그림들을 꺼내보여 주었다. '내가 진짜 위로받은 그림들이 있는데 이거 진짜 장난 아니야 진짜 멋있어, 한번 봐봐 보여줄게' 여기저기 저장했던 그림들을 하나씩 보여주는데 절로 눈이 찌푸려지는 그림들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건지 집 나갔던 눈이 돌아온 건지 그림들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징그러웠다. 뾰족한 스파이크들이 밑바닥에 잔뜩 박힌 신발에 밟혀 피를 흘리는 사람들, 뾰족한 가지들이 여기저기 나있는 나무에 꽂혀 죽어있는 사람들, 보기 흉하게 뒤틀려있는 사지들. 그 그림들이 그랬다. 그런 그림들이었다. 나는 내가 어찌하여 무슨 이유들로 그런 그림들에 위로를 받았던 것인지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했던 그림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그때의 그 순간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지금도 낯이 벌게진다. 마치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림을 보여주자 또 한 번의 당황스러운 반응들이 돌아왔다. 괜찮냐며 많이 힘들었냐며 어깨를 쓸어주는 그 사람들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눈물이 났다.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술집을 나와 골목에 숨어들어 입을 틀어막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잘 지내고 있지 못했던 나 자신을 방치했던 것 같아서, 우울했던 내 상황을 잔혹한 그림들에 대입하여 위로를 받는 줄 알았던 그 순간들이 무서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려 노력했던 그 노력들의 1%도 나 스스로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 가슴 아플만치 미안해서 그렇게 엉엉 울었다. 이렇듯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들과 감정들과 고민 걱정들에 심히 젖어들게 되고, 이를 글이나 그림 음악 같은 것에 대입시켜 위로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이성적인 면을 차리려 노력했던 것 같다. 감정이 깊어져도, 생각이 많아져도 적당한 선에 다다르면 싹둑 가위로 잘라버린다. 그게 나에게 건강하다. 내가 나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나에게 해롭지 않다. 적당한 선에 다다랐을 때 그 선에 닿지 않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이후로는 어떤 문제 상황에 처해졌을 때 조금은 냉철해질 수 있었다. 

아, 또 길이 샜다. 고민과 많은 걱정거리들이 던져주는 보석 같은 글의 존재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어찌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무튼 고민과 걱정거리들이 많다고 해서, 글로 옮길 수 있는 생각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 해도 불안하거나 외롭거나 화가 났거나 혹은 슬플 때 글이 잘 써지는 건 미룰 수 없는 사실이다. 불안한 순간이 오면 불안하지 않으려는 핑계로 펜을 잡고, 외로워지는 순간에는 '왜 나는 외로운가'하며 옛 기억들을 추억하며 글의 서두를 잡는다. 결국 완전하지 못한 순간들에 잡게 되는 펜이 꽤나 마음에 드는 글 줄기를 선사한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편안한 상황에서도 글이 잘 떠오르길 바란다. 행복한 상황보다는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상황에서 탄생한 글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걸 안다. 노래도 행복한 사랑노래보다는 절절한 마음이 담긴 이별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해피엔딩의 로맨스 영화보다는 아쉽고 안타까운 사랑을 담은 슬픈 로맨스 영화가 관객들을 더 끌어모으듯.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떠한가. 이 곳 어딘가에 딱 나만큼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이 나의 편안한 글을 읽어준다면, 그리고 그가 공감해준 내 글로 인해 조금 더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로써 된 것이지. 그런데 여전히 무탈한 일상들 가운데 서있는 요즘의 나는 펜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쥐어짠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또다시 탈 난 일상을 기다리고 있다. 불안하지 않은 일상에 대한 불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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