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 피는 마을 - 우리 동네 이야기

여름을 보내며

by 라문숙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는 요즘 공사가 한창이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오래된 연립주택이 두 군데 있었고 나머지는 밭이나 버려진 공터, 그리고 군데군데 야트막하고 둥그런 무덤들이 있는 산등성이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나무에서 이름 모를 열매가 떨어져 굴러다녔다. 큰물이 나서 콸콸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나가서 집 옆 숲으로 가는 길의 작은 도랑물을 바라보았다. 도랑의 물은 매끄럽고 윤기 나는 몸집을 가진 뱀처럼 구불구불 막힘없이 흘러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났다. 나무들은 키가 컸고 이파리는 제법 넓어서 빗방울을 맞으면 제각각 경쾌하거나 묵직하거나 하는 소리들을 냈다.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 오른 편에 또 하나의 연립주택이 들어오고 나서도 두어 번의 겨울이 지났다. 새로 지은 연립주택은 기존의 주택들보다 높은 곳에 창문을 내서 주변 집들의 안마당이 다 보인다고 걱정하는 소리로 온 마을이 수군수군했다. 어느 날 주택의 아줌마들이 모여서 새로 짓고 있는 연립주택 3층에 올라갔다. 계단 중간 참에 서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집집의 마당 전부가 훤하게 다 보였다. 거기 서서 바라보면 어느 집 수건은 온통 하얀 색이고 어느 집 이불은 알록달록 하고 또 누구네 집에서는 오늘 마당에 나무를 심으며 누구네 는 고기를 굽는다는 걸 모두 알 수 있을 터였다. 아침에는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끈이 풀어진 남편의 헤진 등산화에 발을 꿰고 돌아다니다가 그만 풀어진 끈을 밟아 춤을 추듯 비틀거리다 기어이 넘어지는 날도 종종 있는데다가 넘어지면 그대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씩 누워있기도 하는 나로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깐이었다. 종종거리며 살다 보면 내 집 안마당에 피어있는 꽃들이 새로 피어난 것도 놓치고 지나가는 날이 많은데 하물며 남의 집 마당을 바라보고 서 있을 시간이며 마음들이나 있겠나 싶어서 어느새 심드렁해졌다.


집에 온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겨울에 눈이 내리면 불편하겠다는 말을 한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 두 군데나 있기 때문이다.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길이 막힌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를 걸어 올라온 사람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이런 곳에 사는 나를 원망하기도 한다. 외출할 때마다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을 당연히 여길 만큼 그 언덕길은 가파르다. 나로 말하자면 그토록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걸 마다하지 않고 가끔은 즐기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 짧은 다리를 건너면서 가끔 보았던 오리 식구들을 찾느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촬영장비 창고에서 사는 잘생긴 시베리안 허스키를 울타리 너머로 한참씩 바라보기도 한다. 봄이면 산수유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곳에서 혹시 꺾어진 가지가 없나 살펴 들고 오기도 한다. 모퉁이에 자리 잡은 댁은 여름날 저녁이면 늘어진 능소화가 고즈넉한데 가을이 오면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다는 대추나무도 한 그루 있어서 언제나 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맞은편에 있던 창고 같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공사를 시작한지 벌써 한참이 지나서 어느새 건물의 외형이 제법 갖추어졌다.


얼마 전에 그 공사장 한편에서 상사화 한 포기가 꽃을 피운 걸 보았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꽃을 피운 상사화는 무덤덤해 보인다. 지난 봄 공사를 시작할 때 커다란 나무들이 싹둑 잘려나가는 걸 보고는 남편이랑 내려가서 상사화 한 무더기를 뽑아와 마당에 심었다. 그때 남겨둔 것들이 꽃을 피운 모양이다. 어차피 공사를 하다 보면 땅이 다 헤쳐질 테고, 꽃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파왔는데 그 자리에서도 꽃이 피었구나.

봄에 푸른 이파리를 무성하게 내었다가 남들이 알록달록 꽃을 피울 때 시들기 시작해서 하루하루 정신 나간 여자의 머리채 모양으로 변해가다가 기어이 스러져서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잊힐 즈음 갑자기 꽃대가 솟아나온다. 아, 여기 상사화가 있었구나 하고 해마다 놀란다. 여리고 순한 꽃이 잎도 없이 핀다. 우리 집 마당의 상사화는 갑자기 식구가 늘어나서 놀랄 테고 저 아래 공사장의 상사화는 무리 지어 있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서 역시 놀라겠구나. 공연한 일을 했나 싶다. 어쨌든 상사화도 저리 곱게 피고, 밤벌레 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걸 보니 여름이 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