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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26. 2016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히라마쓰 요코

 그렇다. 아무리 바빠도, 너무 바빠서 눈코뜰새 없이 종종거리느라 세수할 시간이 없는 날에도 배는 고프다. 그뿐인가. 날아갈 듯 기쁜 날,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처럼 즐거운 일이 팡팡 터지는 날에도 배는 고파온다. 지치고 외로운 날, 슬프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잊어버릴지언정 역시 배는 고프다. 그러니까 먹어야 한다. 먹는다는 건 그래서 더 기쁘고 더 즐겁고 더 슬픈 일이다. 먹기는 바로 삶이다. 잘먹기에 애를 쓰는 게 우리 인생에 대한 예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하는 말, 그 간단한 말을 끊임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먹어서 그랬고 젊었을 때는 마른 몸집 때문에 그랬다. 요즘도 가끔 듣기는 하지만 대체로 잘 먹는 편이다. 그래도 먹는 것보다는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하고 만드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 내게 '히라마쓰 요코'의 에세이 '바쁜 날에도 배가 고프다'는 안성맞춤이다.


아침 풍경


짧은 글마다 간단한 레시피가 딸려 있다. 사실 레시피라 하기에도 낯간지러운 것은 그녀가 소개하는 것이 토마토에 소금을 뿌린 것, 두부에 올리브오일과 소금을 뿌린 것, 간장에 살짝 버무린 닭다리살에 밀가루를 묻혀 튀기는 것, 갓 지은 밥을 소금을 묻힌 손으로 주물러 주먹밥을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작은 책은 정교하고 체계적인 요리책이 아니라 담백하고 맑은 수필집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다만 그 소재가 음식과 식재료와 그릇일 뿐.


소금을 뒤집어쓴 오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누운 채로 할 일을 생각했다. 아침 7시에 아이를 내보내고 나서 장조림에 넣을 계란을 삶는 것으로 시작한 음식 만들기는 오후 늦게 연한 취를 소금물에 데쳐서 볶아 나물을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음식들을 만들면서 히라마쓰 요코의 간단 명료한 먹거리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녀처럼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내는 간단하지만 세심한 조리법의 음식들을 즐긴다면 나처럼 음식 만들기가 부담스러운 이들이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만큼이나 손이 느리고 서투른 시누이도 가뿐하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차려 시어머니와 함께 즐길 수도 있으며 가끔은 시어머니 본인도 기꺼이 식사 준비를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우메보시 보리차


히라마쓰 요코가 이야기하는 맛은 밖의 맛이 아니다. 유명세를 치르는 맛집이나 별 몇 개의 셰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 집에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먹는 집밥의 매력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풀어놓는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져서 책날개를 읽어봤다. 음식과 맛, 세계 각지의 식문화에 관한 글을 쓰며 도시형 슬로 라이프스타일의 전파자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호박죽

집에 있을 때는 방 안에 바람이 통하게 해두면 참 좋다. 그래놓고 멍하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걸지 않고, 이따금 하품이나 하면서 완벽하게 빈둥거리고 있으면, 그러는 사이에 만족감이 찾아온다. 문득 충만함이 저 너머에서 물밀듯이 찾아든다.                                                                                                       p.85

언젠가 친정에 갔을 때 거실 바닥에 누워서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어디 방 하나 얻어서 며칠 동안 종일토록 잠만 잤으면 좋겠어라고. 나는 무심하게 내뱉은 그 말을 두고 엄마와 동생은 두고두고 곱씹어 화제에 올렸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순무 구이


선입견에 빠져들면 뱅글뱅글 같은 곳을 맴돌게 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언제나 같고, 생각이 달리는 선로도 마찬가지다. 전혀 다르게 생각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결국 그 자리에 머물고 만다. 선입견이란 무섭다. 원치 않아도 어느새 꾸물꾸물 들어찬다는 점에서 힘들다. 선입견을 던져버리면 눈앞이 확 밝아지는 건 요리도 마찬가지다. 두부는 차갑게 해서 소스를 끼얹어 먹거나 으깨서 시금치와 버무린다. 감자는 고기를 넣고 조린다. 이런 방법은 확실한 맛을 보장하지만, 한편으론 지겹기도 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전개 없이 재료가 지닌 맛의 범위가 전혀 넓어지지 않는다.  
                                                                                         pp.180~181


내가 깨트려야 할 선입견도 많을 것이다. 음식은 언제나 먹기 직전에 만들어야 맛있다는 것, 내가 어떤 어떤 식재료들을 싫어한다는 것, 이를테면 고기, 해물, 생선회 등등.


지금은 깨진 찻주전자


내 손에 잘 길들여진, 물이 깔끔하게 따라지는, 그런 맞춤한 찻주전자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평생의 재산이다. 차로부터 스며든 물때의 빛깔, 차의 색감이 찻주전자에 잠자코 스며들어간다. 그 운치로부터 오는 맛의 깊이는 누구도 아닌 나만의 것. 날마다 생활하는 시간이 주전자에도 차곡차곡 쌓여가니까. 먼저 마음에 드는 주전자를 손에 들면, 그것만으로도 차를 맛있게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pp. 197~199


몇 달 전에 아끼던 찻주전자를 깨트렸다.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드물게 마음에 드는 하얀색의 소박한 모양새와 야무진 쓰임을 아꼈는데 그만 잃고 만 이후로 아직 마음에 쏙 드는 찻주전자를 만나지 못 했다. 새삼스럽게 나도 일생의 찻주전자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마치 찻주전자 하나만 있으면 '히라마스 요코'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이토록 담백하고 맑은 글을 쓸 수라도 있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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