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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31. 2016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하리와 오렌지 시럽

                                                                                                                                                                                                                                                                                                                                          칼을 갈았다. 군데군데 날이 무디어지고 이가 빠져서 자주 갈지 않으면 잘 들지 않는 칼을 갈았다. 칼을 살 때 함께 구입한 칼 가는 도구를 요즘 자주 쓴다. 날카롭게 간 칼로 오렌지를 썰었다. 매끄럽고 부드럽게 오렌지 과육이 잘리고 노란색 향기가 난다. 오렌지 두 개에 얼음 설탕 250그램이다. 그거면 된다.



오렌지를 소독한 유리병에 나란히 포개어 담고 중간중간 얼음 설탕을 넣는다.



병이 작은 건지 오렌지가 많은 건지 넘칠 지경이 되도록 담았다.
뚜껑을 얹고 힘주어 누른 다음 밀폐하기.



하루에 한 번씩 오렌지가 시럽에 완전히 담기도록 휘젓거나 병을 흔들어주면서 3,4일 정도 숙성시키면 오렌지 시럽이 된다. 냉장고에서 열흘 정도 보관이 가능한 간단한 시럽이다.



넉넉한 사이즈의 저그에 얼음을 담고 오렌지와 시럽을 덜어낸 다음 평소보다 조금 진하게 우린 차를 따르면 오렌지 아이스티다.



앞으로의 계절에 인기가 많을 거다. 오렌지도 좋고, 딸기나 사과도 괜찮다. 향기가 좋은 과일들로 손쉽게 만들어 즐기기 좋은 시원한 음료수다. 차를 우리기가 번거롭다면 탄산수를 부어 청량함을 즐겨도 좋다.
이렇게 보내는 시간은 오렌지 즙처럼 달콤하고 싱그럽지만 나의 주방에서는 오렌지 시럽만 익어가는 게 아니다. 손으로 과일 껍질을 벗기고 깨소금을 갈고 두부를 써는 동안 머릿속에서 생각도 익어간다. 며칠 전 만난 친구랑 주고받은 이야기, 어제 읽다 만 책, 다가오는 집안 행사, 떠나고 싶은 여행 등등 머릿속의 생각도 자라고 가슴속의 감정들도 걸러진다. 손에 익은 일들을 할 때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어쩐지 주방에서의 모든 일들은 주방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니까 얼른 먹고 치워야지 하는 생각 뒤에는 항상 음식을 만들고 흔적을 치우고 난 이후의 무언가가 숨어있는 거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며칠 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서점에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보낸 시간과 집에서의 시간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필요한 법이다. 서가를 두어 바퀴 돌고 나면 오랜만에 드러냈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과 단어들과 표정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이름. 줌파 라히리다. 그녀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표지와 제목은 낯이 익었다. 게다가 아주 얇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글을 잘 읽지 못한다. 멀미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덮을 수 없었다. 하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운 광역버스 창가에 앉아 흔들리면서 읽은 몇몇 문장은 멀미도 쫓아 버릴 만큼 강했다. 그녀의 말대로 '번개를 맞은 것처럼'. 런던에서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의 아이로 태어난 그녀는 미국에서 자라고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다. 벵골어와 영어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된 후 이탈리아 여행 중에 만난 이탈리아어는 그녀에게 무분별하고 말도 안 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격렬한 긴장, 번개에 맞은 것 같은 느낌으로.



밤에 잠들기 전에 두 번째 읽기를 끝냈다. 다시 읽을 때는 '영어'와 '이탈리아어'에 다른 단어들을 넣어서 읽어보기도 했다.  '영어'의 자리에는 '주부, 엄마, 아내, 아줌마' 등등 대체할만한 단어가 제법 있었지만 '이탈리아어' 대신 넣을 단어는 찾기 힘들었다. 막연하고 희미했다. 그거였다. 나는 다른 내가 되고 싶긴 하지만 그게 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도대체 여태껏 살면서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갈망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그렇게 간절히 구하고 탐색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던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방에서 도망가고 싶다고 끝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주방에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는 아이러니를 설명할 길이 보인다. 두려운 거다. 안 할 거야라고 하면서 정작 하지 말라고 할까 봐 겁내는 아이처럼. 그러니까 주방에서 이렇게 열심히 오렌지를 썰고 있는 거 아니겠어.  말로는 뭔가 다른 걸 하고 싶다고 하면서 안 하잖아.  그게 뭔지 몰라서. 게을러서, 겁이 나서, 그러니까 이런 내 모습을 마음에 안 들어 하기보다는 진정 하고 싶은 것, 마음을 다하고 싶은 것, 정신없이 빠져들 수 있는 것,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거지. 

                                                                                                                                                                                                                                                      




'평생 나는 액자 안에서 특별한 무엇을 보고 싶었다. 정확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비춰줄 거울이 그 안에 들어 있기를 바랐다.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전체적인 모습의 사람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없었다. 이중의 정체성 때문에 흔들리고 왜곡되고 위선적인 모습만을 보았다. 혼성이고 선명치 않으며 늘 혼란스러운 무엇을 보았다. 액자 안에서 특별한 이미지를 볼 수 없는 건 내 인생이 어지러워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찾는 이미지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거울에 텅 빈 공간이 비칠까 봐,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없을까 봐 두렵다. 나는 이 빈 공간에서, 이런 불확실에서 왔다. 빈 공간이 내 원천이요 운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빈 공간에서, 이 모든 불확실에서 창조적 충동이 나왔다. 액자를 채우고자 하는 충동이 말이다. '       

                                                                                                                              p.126


줌파 라히리는 창조적 충동으로 글을 쓴다. 나는 그녀의 단편집 '축복받은 집'을 읽고 있다. 비록 오렌지 시럽이나 마시면서 소설책을 읽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빛이 비쳐 드는 걸 느낀다. 나 자신에게 가는 길이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안다. 액자 속의 여인이 다른 여인이거나, 아니면 지금 내 모습이거나 어쨌든 액자는 채워질 거라는 사실을. '시도하는 것은 곧 노력하는 것이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무수히 많은 시도들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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