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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24. 2016

2016.7.24 - 여행 준비

                                                                                                                                                                                                                                                  

칼이 무디어져서 자주 갈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잘 드는 칼 하나만 장만하면 부엌일이 한결 가뿐해질 것 같았다. 10 년 넘게 사용하던 헨켈의 칼을 새것으로 바꾼지 일 년 남짓 지났는데 벌써 마음에 안 든다. 쪽파를 썰거나 풋고추를 얇게 저밀 때의 둔탁한 느낌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손이 붓거나 몸무게가 늘어서 둔해진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기어이 작은 사이즈의 칼을 하나 샀다. 나무를 깎아 만든 손잡이에 얇고 매끄러운 칼날을 가진 그것은 매혹적이었다. 어제 감자껍질을 벗기고 조각을 내는데 마치 두부를 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 칼로 복숭아를 자르다가 손을 베었다. 피를 보는 순간 멀미가 났다. 설거지도 놔두고 거즈로 손가락을 싸맨 후에 부엌에서 나왔다. 씻지도 못하고 누웠는데 선잠이 오락가락했을 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늦게까지 뒤척이며 내가 한 일은 비를 기다리는 것.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살폈으나 비가 내린 흔적이 없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몸은 무겁고 손가락은 답답하였다. 마땅히 먹을 게 없는 날이면 으레 만드는 토마토 판차넬라샐러드를 한 양푼 만들어서 커피와 함께 냈다. 



선풍기 틀어놓고 어제 만든 젤리 먹으며 여행정보지를 팔랑팔랑 넘겨보아도 별게 없다.


도대체 저 곱슬머리 어린 왕자는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길고 날렵한 칼 한 자루는 손에 쥐었으나 레이스로 만든 바지에 금빛 허리띠, 화려한 초록색 코트 자락을 펄럭인다. 뭐 특별한 게 있겠느냐고, 겨우 3박 4일 일 뿐인데, 애초에 라벤더를 보고 싶을 뿐인 간단한 여정이니 그리 복잡하지도 않을 거라고, 여행정보 책자를 넘겨봐야 기차 시간표를 외울 것도 아니고 눈을 찡그리며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작은 사진들을 보며 관심을 가질만한 곳을 물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하는 듯하다. 몇 장 넘기다가 책은 탁 덮어버린다. 

오늘은 세탁을 했으니 내일은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하고 일찍 자기.
그게 내 휴가 준비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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