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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02. 2016

2016.8.25 - 오후 3시를 마칩니다

                                                                                                                                                                                                                                                                 

호기심 혹은 재미를 위해, 반쯤은 장난삼아 오후 3시를 시작했습니다. 신선하고 즐거웠습니다.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가도 오후 3시의 알람이 울리면 반가웠습니다. 오후 3시에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블로그에 쓰기 위해 잠시 일상을 멈추는 일은 휴식 같았지요. 두어 주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겁이 더럭 났습니다. 오후 3시에 매일 글을 올리려면 별일(?)이 없어야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오후 3시를 거른다는 건 일상이 깨어진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한동안 조심조심 살았습니다. 오후 3시 카테고리에 글이 하나씩 추가되면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시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물론 매일 오후 3시에 글을 올린다는 처음의 약속은 지키지 못 했습니다. 주방을 떠날 수 없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운전을 하는 중이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시간을 옮겼어요. 그런 날에는 오후 3시의 기록이 아니라 그날 하루의 일상이 올라갔습니다. 전업주부의 하루가 그리 특별할리 없으므로 비슷비슷한 기록들이 이어졌지만 기록을 계속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정말 똑같은 날은 하루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오후 3시면 항상 아이를 데리러 간다는 분이 계셨지요. 그래서 매일 똑같은 날들의 반복일 거라 하셨습니다. 날씨도 다르고 기분도 다를 거다. 돌아오는 길에 장에 들릴 수도 있고 놀이터에서 놀다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의 답글을 드렸는데  놀랍게도 정말 그랬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매일 하는 식사 준비도 매일 같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매일 새날이고 매시간 새로운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이었지요. 틀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 분도 계셨습니다. 영혼 없는 글쓰기를 경멸한다는 분도 계셨어요. 아플만큼 속도 상했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았습니다. 틀을 고집하는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즐겁게 썼고 감사하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어요. 시간이 늦으면 어디 아프냐고 묻는 분도 계셨고 틀린 글자를 바로잡아 주시기도 하셨지요.



작아서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즐거움, 찰나의 기쁨, 마음을 열지 않으면 함께 즐거울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일 년이 지났습니다. 즐거운 날도 있었고 심술을 부리는 날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슬펐지요. 이룬 게 없으므로 내세울 것이 없었고, 그래도 누추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순간에, 주변의 작은 것들에 집중하며 살고 싶었는데 지난 365일 동안 오후 3시를 기록하면서 그저 그런 일상을 더욱 건강하고 어여쁘게 변모시키는 비밀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행복해지는 비법을 조금은 터득한 것도 같아요. 그만큼 저란 사람도 단단해지고 느긋해졌지요. 2015년 8월 25일에 일 년 동안 오후 3시를 기록해보겠다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8월 26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오늘이 8월 25일이니 꼭 일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단어벌레의 블로그는 다시 예전처럼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가 될 거예요. 함께 시작했던 분들, 오후 3시를 응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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