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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06. 2017

어지르면 좀 어때?

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 - 제니퍼 매카트니

                                                                                                                                                                                                                                                  

아침 혹은 늦은 밤에 연필로 '할 일'을 적곤 한다. 긴 목록의 어딘가에 반드시 '정리하기'가 있다. 책상 정리, 주방 서랍 정리, 안 입는 옷 정리, 마당 구석에 쌓인 빈 화분과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의 정리, 사진과 메일함의 정리 등등. 신기한 건 같은 목록에 들어있는 다른 일들과 달리 거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지 못한 데 대한 부담감이 다른 항목들에 비해 크지 않다는 것, 일상을 영위하는 데 별지장이 없다는 점이다.  매일 숙제처럼 오늘은, 내일은 하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다른 일에 밀려 저녁이 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눈을 슬쩍 감아버린다는 점도 그렇다.


아침의 책상


출장 다녀와서 미처 짐 정리도 못하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제일 먼저 부려놓는 것은 일주일치의 빨랫감이다. 주말을 대비한 장보기도 빠트리지 않았으므로 지난 금요일의 주방과 세탁실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분주함에 일주일치 생활의 잔해가 더해지고 그밖에 먹고 입고 씻는데 필요한 온갖 물건들로 넘쳐났는데 종이봉투에 담긴 책 한 권의 제목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니!
용감하구나.



아이 방에 들어가면 습관처럼 책상 정리만 해도 인생이 단순해진다고 잔소리를 했다.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복잡하면 그게 집안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듣고 눈이 시리도록 읽어서였을까. 고적하고 느긋하게 쉬고 싶을수록 버릴 물건, 정리할 장소가 더 보였다. 책장이 모자라지도 않는데 책을 몇 박스나 정리하고 서랍장에, 싱크대에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물건들을 버리려고 끄집어내기도 여러 번이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남아있는 오래된 스테인리스 볼 하나를 앞에 놓고 앉아서 오래전 그 볼에 얼음을 얼렸던 엄마를 기억했다. 송곳으로 얼음을 깨면 날카롭고 매끄러운 얼음조각들이 만들어졌다. 화채나 냉국, 인스턴트 주스 속에 투명한 얼음조각이 떠 있었던 내 유년의 여름이 찌그러진 스텐볼에 남아있을리도 없건만 결국 다시 제 자리에 놓어 둔 것도 몇 번째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리는 항상 뒷전이고 나는 그걸 내가 게으른 탓이라고 여기면서 여전히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의 심정을 가슴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어지르고 살기'라니 내용을 읽어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시원해지고 말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책 한 권에 붙일 수 있는 꼬리표의 목록에 스무 가지는 채워 넣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사람, 하다못해 읽고 싶은 책이라도 생기는데 그 모든 점에서 이 책은 예외다. 지금 이대로 있으면 된다! 서두를 것도 욕심부릴 것도 없이 지금처럼, 여전히 게으르게 내 자리를 지키면 그만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서점에 가면 온통 간단하게 살기, 비우고 버리기, 미니멀리즘, 정리하기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간단하고 심플한 삶이 모든 인생의 모범답안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집과 물건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만 버리면 된다고 한다. 여백이 많은 집에서 느리게 움직이며 느긋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역설적으로 집을 더 복잡하게 보이게 만들고 일은 많아져서 결국 정리하고 비우는 데 대한 자신의 무능만을 매번 확인하게 한다. 그에 비하면  작고 얇고 어쩌면 볼품도 없는 이 책은 얼마나 스마트한지! 그대로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에 마음이 놓인다면 과장일까? 끝없는 정리의 압박감 뒤에 숨어있는 건 복잡하고 어수선한 집안이 아니라 꼬이고 뒤틀린 내 인생이라는 사실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느낌이다. 물건만 정리하면 내 삶이 시원스럽게 정리될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던 거다.


복잡한 책상, 쌓인 설거지감으로 가득한 싱크대를 볼 때마다 절로 나오는 한숨, 민망함, 죄책감, 부끄러움에 대하여 관대해질 수 있어서 좋다. 최소한 그 점 하나만으로도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지만 다 읽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집이야 어질러진 대로 그냥 산다고 해도 어질러진 내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지 생각해 보는 밤. 물건을 정리하고 마음도 정리하고 그래서 맑고 투명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좀 접어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좀 해 보고자 한다.  세상은 물론 나와 내가 사는 방식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오는 봄처럼 우리들 인생도 이대로 괜찮으니까. 정리를 못한 건 내가 근성이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이 많은 만큼이나 정도 많고 사랑도 많아서라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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