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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16. 2017

평범한 중년의 특별한 행복

평범한 게 어때서 - 로빈순 에세이

                                                                                                                                                                                                                                   

   기침은 제법 잦아들었다. 휘청거리면서도 마당에 나가 꽃 심고 마른 잔디 걷어내는 남편 구경하면서 잔소리도 한다. 아침과 점심은 초간단으로 해치우고 저녁도 그리 다르지 않다. 밥하고 장조림, 혹은 밥과 북엇국에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인 밥상이 며칠째 계속이다. 어둠이 내리는 부엌 창 앞에 남편과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면 하루가 끝이다.  매일 저녁 모니터 앞에 앉아서 졸다가 그예 일어나서 자는 방으로 건너간다. 잠은 넘치도록 자고 있는 셈이다. 환자 행세를 하면서 누워있거나 의자에 파묻혀 있다 보니 오히려 책은 감기에 걸리기 전보다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전에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고서 한 시간에 얼마나 읽을 수 있는지 점검해보겠다고 생각했던 걸 실행해봤다. 평균 잡아 한 시간에 70~80쪽이다. 하루에 4,5 시간을 온전히 책 읽기에 쓸 수 있으면 나도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겠다는 호기도 생겼다. 위험한 만큼 매력적인 생각, 이게 다 감기 때문이다. 좋은 말도 여러 번 하면 듣기 싫은데 감기 걸린 게 뭐 좋은 거라고 매일 감기 타령인지 모르겠네.


  저녁 먹고 난 후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주로 한 일은 온라인 서점에서 책 고르기다. 무수히 많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비우고 다시 담고 비웠다. 나는 서점에 가서 책을 잔뜩 안고 계산대로 가려는 순간에 온라인 서점의 '10% 할인'을 기억해 내는 순간을 싫어하는 것 중의 으뜸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들을 다시 비운 것은 내가 직접 그 책들의 표지를 만져보지 못하고, 책장을 넘겨보지 못하고, 일부분이나마 읽어보지 못한 채 그 책들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책을 사는 방법은 서점에 가서 마음껏 책을 고른 다음 당장 읽고 싶은 것,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만 계산하고 나머지는 적어놨다가(요즘은 그것도 귀찮아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만행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지른다) 집에 돌아와서 온라인 서점에 주문하는 것이다. 맞다. 나는 치사하고 좀스러우며 아까운 게 많은 아줌마로서 책이 거저 생기거나 선물로 받으면 책의 장르나 내용은 차치하고 일단 신이 난다. 하물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이 삐죽 나오며, 내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가 문득 지금 내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라니! 



  나는 '로빈순', 그녀와 많이 다르다. 직장에 다니지 않고 쌍둥이 엄마도 아니다. 뜨거운 음식보다 차가운 음식을 좋아하고 '응답하라 1988'이나 '태양의 후예'같은 드라마도 보지 않았다. 찜질방에 가본 적도 없고  웹툰도 보지 않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하고 싶다. 잠옷을 입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고 츄리닝은 학교 체육시간 외에는 입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는 40대, 나는 50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그녀와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린 너무 닮았다. 여전히 철이 없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며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옷장 앞에 서서 입을 옷이 없다고 투정하고 아줌마 스타일 속옷을 입고는 손이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빵과 커피가 없으면 허전하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다. 가끔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며 멀쩡한 세탁 바구니를 눈앞에 두고도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는(우리 집은 뒤집어 벗은 채로 놓아두는) 네안데르탈인과 결혼해서 잔소리를 들어가며 산다. 그리고 미용실에 간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미용실에 가면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는 느낌이 좋다.
모두들 상냥하다. 스타일 좋고 멋진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기까지 하면 
팍팍한 삶이 조금은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커피도 주고
차도 주고 잡지도 주고 편히 읽으라며 무릎 위에 쿠션도 놓아준다.
그럼에도 혹시 다른 불편은 없는지 유심히 관찰해가며
관심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그러한 친절을 베푼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게다가 그 친절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 나는 그냥 멍 때리고 앉아 있으면 된다.
잡지를 봐도 되고, 책을 읽어도 되고, 안 보는 척하며 다른 손님을
구경해도 된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나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된다는 것', 나는 소중한 사람인 것이다.

                                                                      [평범한 게 어때서] 중에서



   선이 단순한 그림이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그늘에 앉아있던 나는 점점 더 많은 직사광선을 받게 되었지만 그 따뜻하고 밝은 느낌이 좋아서 그대로 앉아 끝까지 읽었다. 감기에 걸리고 나서야 감기에 걸리지 않았던 때가 그리워지는 것처럼 잘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주목받는 일도 없고 그저 따라가기 바쁜 일상을 지나온 사람들은 나중에서야 그 평범하고 맨숭맨숭했던 시절이 소중했던 걸 안다. 그저 그런 평범한 날들을 지내다 보면 어느덧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어있더란 행복한 이야기다. 이 핑크색의 '러블리'한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시간만큼은 평범한 우리들의 행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진다. 감기에 걸린 이들이라면 감기약으로도 처방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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