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y 17. 2018

나의 사랑하는 생활 22-오월 정원 1


은방울꽃


오월은 은방울꽃의 향기로 온다. 이름과 모양이 어쩜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볼 때마다 감탄을 한다. 과천 어디쯤의 야생화 농장에서 형체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마른 뿌리들을 하나에 천 원씩 주고 산 게 이 은방울꽃들의 시작이다. 마당에 쌓인 눈이 녹고 언 땅이 풀리면 갈색의 뾰족한 싹들이 올라온다.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면 동그랗게 말린 초록 색 잎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해에 꽃을 피울 건지 아닌 지는 바로 그때 벌써 알 수 있다. 잎이 펴지면서 작은 점 같은 꽃망울을 단 꽃대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면 조용히 잠들었던 달콤하고 서늘한 향기가 내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깨어난다. 작은 꽃들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고 행여 방울소리가 들릴까 귀도 기울이고 향기에 취한다. 이게 무슨 호사인가 생각한다.





모란


모란은 모두 네 그루다. 어렸을 때는 모란과 작약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가 작약은 풀이라 겨울이면 뿌리만 남아 마당에서 볼 수 없지만 모란은 나무라서 가지가 남아있다고 알려주었다. 듣고 본 것들 중 잊은 것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무수히 많으나 그중에서도 작약과 모란을 구분하는 법을 잊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내가 나이 들어 작약과 모란이 있는 마당을 갖게 될 것이란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가장 키가 크고 무성한 모란은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에서 살고 있는데 해마다 제일 먼저 꽃을 피우지만 그중 인물이 덜해서 간혹 내게 구박을 당하곤 한다. 오늘 그 모란의 시든 꽃들을 모두 잘라 주었다. 시든 꽃들을 모두 잘라내니 싱그러운 초록색만 남아 인물이 훤하다.




수국


처음 이사 왔을 때 데크에 수국 화분이 여러 개 있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시들고 마른 그것들을 마당 귀퉁이에 나란히 심었다. 다음 해에 윤기가 나는 초록색 잎들이 나왔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가을이면 꽃눈을 무수히 달아 이듬해 봄을 꿈꾸게 하기도 여러 번이었으나 번번이 봄날의 꽃샘추위에 꽃눈들이 얼어서 말라버리기가 일쑤였다. 몇 해 살아보니 마당 귀퉁이라 생각했던 곳, 수국들을 심었던 그 자리가 식물들에게는 명당인 걸 알았다. 드물긴 하지만 분홍색 탐스러운 꽃을 피울 때가 있어서 포기하지 못하는 마당의 수국은 거의 언제나 초록 잎만 무성할 뿐이고 정작 봄의 마당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수국들은 해마다 새로 사들이는 게 대부분이다. 오늘 바싹 마른 작년의 수국 가지들을 밑동까지 잘라냈다. 윤기나는 초록 이파리들만으로도 충분히 예쁘긴 하지만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꽃피우기를 게을리하는 건 좀 염치없는 짓이라고 수국 덤불 옆에 심은 상추잎을 딸 때마다 속삭인다.




샐러드용 갖은 채소
아침 샐러드


샐러드믹스 씨앗 봉지를 아낀다. 올해도 나무 박스에 줄 맞춰서 씨앗을 뿌렸다. 상추와 루콜라, 경수채, 빨간 무 등이 섞인 씨앗 봉지다. 씨앗을 뿌린 지 20여 일이 지나면 먹을 수 있다. 그중 도드라지게 자란 녀석들을 먼저 뽑아서 샐러드로 만들었다. 냉장고에 넣고 싶지 않은 먹거리 중 으뜸인 토마토가 주워온 아이처럼 냉장고 야채 칸에 들어있길래 함께 접시에 담고 오일, 소금, 식초, 후추가 섞인 드레싱을 흔들어 휘리릭 뿌려서 며칠 전 아침으로 먹었다.




층층나무


이사 와서 이듬해 봄에 빨래 널러 이층 발코니에 나갔다가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덮인 광경을 맞닥뜨렸다. 넋을 잊고 바라보느라 한참을 보냈다. 나중에 나무 이름이 층층 나무란 걸 알았다. 단정한 이파리가 탐스럽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하얀 꽃을 피운다. 보통의 나무들보다 빨리 자라는 나무여서  놀라운 속도로 자랐다. 해마다 무성해져서 그늘이 많아지고 가지들이 집을 덮어버릴 지경에 이르자 나무를 베는 사람들이 와서 베어버렸다. 혹시 나무가 쓰러지면서 집을 덮치지 않을까 염려해서 밧줄로 나무를 묶어 여러 사람들이 밧줄을 잡고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을 조정했던 것이 생각난다. 몸이 잘려나간 나무둥치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 둔중하고 뻐근하게 느껴지던 무게의 어두운 죄책감은 여전하다. 그때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단 이유로 살아남은 또 다른 층층나무가 어느새 이렇게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보다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너무 커서 숨길 수도 없고 나무들이 다이어트도 모를 테니 구름처럼 하얗게 꽃이 핀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고 만다.




꽃아마


도쿄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후타고타마가와 (二子玉川)라는 곳이 있다. 역에서 내려 맞은편에 있는 백화점의 뒷문으로 나가 조금 걸으면 린넨버드란 상점을 볼 수 있는데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가게 앞 화분에 아마를 심어두는 곳이다. 작고 귀여운 꽃이 핀다. 어느 해인가 그 아마씨를 조금 얻었다. 마당에 뿌려놓고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느 날 낯선 싹이 나란히 난 걸 발견했는데 어떤 식물의 싹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 검색했더니 바로 '꽃아마'란 결과가 나왔다. 동그랗고 귀여운 싹이 나오는데 몸이 곧고 키가 크다. 곁 가지 하나 내는 일이 없고 줄기는 오직 하나다. 옆은 보지 않고 위로만 자라서 귀여운 꽃을 제법 많이 피운다. 하늘거리는 꽃잎은 보라색을 띤 파란색이다. 정원에 파란 꽃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내 욕심을 알았는지 이 아마란 녀석은 꽃이 지고 잎이 다 말라 떨어져도 씨방을 열지 않고 씨앗을 간직한다. 밑동을 잘라 묶어 두었다가 다음 해 씨앗을 뿌리면 어김없이 싹이 튼다. 사진의 아마는 작년 가을에 남편이 수확한 것. 오월의 한낮에 바스락거리는 빛바랜 줄기들의 묶음이 얼마나 예쁘던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여름 찻 주전자와 찻잔


비가 세차게 내린다. 홈통을 내려가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간간이 천둥 소리가 들리는 밤, 마당의 어린 싹들은 흙투성이가 될 것이고 막 봉오리를 연 작약들은 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다가 투명해진 꽃잎으로 이른 하직을 할 것이다. 장미가 벙그러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걸 보고 들어왔으니 꽃은 아직 피지 말아라.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사랑하는 생활 21 - 순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