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환한 밤을 주세요

by 라문숙


내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다면 환한 밤을 주세요. 상추를 씻고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를 하느라 보낸 낮,
언덕을 달려내려가 지하에 있는 슈퍼에서 우유와 어묵을 사느라 보낸 낮, 창문이 없는 서점에서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느라 보낸 낮, 마른 수건을 접고 빈 화장품 병을 버리려고 고개 숙여 그대로 지나친 낮들 대신에요. 어질러진 부엌을 치우고 책상에 앉으니 밤, 밤은 어두워서 창밖은 까맣게 깊었어요. 조도를 낮춘 서점에서 눈을 부릅뜨고 책을 골라온들, 손 등에 발라보고 향기도 맡아보며 아이크림을 골라온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밖은 이미 밤인걸요. 어두운 밤. 그러니 그대가 내게 뭔가 주고 싶으면 환한 낮을 주세요. 55살에 소설 강좌를 듣고 63살에 문예상을 탄 일본 주부의 소설과 무덤을 열고 들어가 스스로 죽음이 되어 모래먼지의 이름으로 썼다는 시인의 산문을 읽을 낮을 주세요. 낮을 줄 수 없으면 낮처럼 환한 밤을 주세요. 필통 속의 만년필을 손에 잡을 수 있도록, 멀리서 온 편지에 답장을 할 수 있도록, 그리운 이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도록, 마사지 크림을 듬뿍 바르고 번들번들 기름이 돌 때까지 얼굴을 문지를 수 있도록, 색색의 고운 실로 자수를 놓을 수 있도록,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밝은 밤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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