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에 마당에서 덱으로 올라오는 계단 옆의 모란을 파서 옮겼다. 겨우내 품고 있던 눈이 터져서 꼬물거리는 잎들이 펴지려 하는 중이었다. 뿌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옮겼고 무사한 듯 보였다. 날씨가 예년과 달라 마당의 모란들이 모두 늦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게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모두 네 그루인 모란은 무섭게 자랐다. 지금 한창 꽃을 피우거나 봉오리를 부풀리는 중이다. 다만 앞서 자리를 옮긴 모란은 예외다. 꽃봉오리는 생겼으나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평소의 반의반도 못하는 크기의 꽃을 피웠지만 꼭 조막손 같았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기형의 꽃잎을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자리가 옮겨진 모란은 아프다. 아직 그곳이 자기 살 곳이 아니라고 여기는가 보다. 자기 자리를 가지지 못한 것들은 아프기 마련이란 걸 모란에게 또 배운다.
오월에는 종 모양의 꽃들이 핀다. 캄파눌라, 무스카리, 은방울꽃, 블루베리. 둥굴레 꽃이다. 무스카리는 바삭 말라서 꽃대를 자른 게 며칠 전이고 블루베리도 꽃이 진 자리에 어느새 열매가 맺혔다. 지금 마당의 주인공은 은방울꽃이다. 커다란 잎 뒤에 수줍게 숨어서 피지만 꽃은 의외로 단단하고 야물다. 그리고 향기롭다. 앞을 하나씩 젖혀가며 잡초를 뽑았다. 줄기를 젖힐 때마다 향기가 폭죽처럼 터진다.
소설 [순수의 시대]에서 아처는 약혼녀인 메이에게 매일 은방울꽃을 보낸다. 메이는 뉴욕의 상류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을 의심 없이 내면화한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듯이 행동한다. 도와주는 척하면서 내몰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런 모든 태도와 삶의 방식이 어디로 향하는지 메이 자신이 알지 못했다는 게 놀랍다. 언제나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정원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이 위선과 부정직함으로 가득한 소설의 제목에 ‘순수(innocence)’란 단어를 넣고, 메이에게 은방울 꽃다발을 들게 한 걸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은방울꽃 속에 혹시 무엇이라도 숨어있는 건 아닌가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더 이상 순결한 것은 아마도 찾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은방울꽃의 속내를 의심한다.
늦가을이면 산에서 부엽토를 얻는다. 겨우내 부엽토 이불을 덮고 지낸 식물들은 한층 건강해진다.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된다는 건 식물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부엽토가 땅의 힘을 끌어올린다고는 하나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산속에 살던 온갖 식물들의 씨앗이 함께 들어오기 때문이다. 새싹이 나는 계절에는 잡초들과의 전쟁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풀을 뽑다 보니 은방울꽃그늘 아래에서는 잡초만 사는 게 아니었다. 수레 국화도 있고 양귀비도 있고 한련화와 겨자, 달맞이꽃의 어린 싹들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냥 놔두자니 곧 비좁아져서 모든 식물들이 힘들어할 것이고 뽑아버리자니 아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낭패다. 순수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오월엔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오래전 아이에게 사준 동화책이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작품일 것이다. 작가, 케네스 그레이엄은 49세에 다니던 은행에서 퇴직한 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장으로 다시 이주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썼다. 어째서 작품을 더 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날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책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레이엄은 두더지가 봄 햇살에 이끌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어디 두더지뿐일까. 마당에 은방울꽃 향기가 떠돌고 모란 꽃잎이 나풀거리는 봄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밥을 짓고 책장을 넘긴다면 그런 내가 이상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