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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겨울

by 라문숙

좀처럼 눈이 녹지 않는다. 장화를 신고 마당에 나갔다. 햇볕이 내려앉고 바람이 한바탕 지나간 후에도 처음 내려 쌓인 그대로다. 발목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묵직하다. 데크에서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파묻혀 흔적도 없다. 어림짐작으로 조심해서 딛는다. 아랫집 뾰족 지붕에 쌓인 눈도 그대로다. 시선을 멀리 두니 건너편 산에 헐벗은 나무들이 보인다. 잎 떨군 가지에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부럽다. 낮은 담벼락 아래, 햇살이 모이는 곳에 고양이들이 앉아서 뒤뚱거리는 나를 구경한다. 그러니 더더욱 넘어지면 안 된다.



1월 초순이다. 새해 아침에 떡국을 끓였고 지난주에는 새해 다이어리가 도착했다.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살피고 코로나 확진자 수를 확인한다. 어제 읽던 책을 이어 읽고 무뎌진 연필을 날카롭게 다듬는다. 차를 우리고 커피를 내린다. 누룽지를 끓이고 만두를 찌고 떡볶이를 만들어서 끼니를 때운다. 어제는 노란 알배추 한 통을 모두 넣고 된장국을 끓였는데 예상했던 맛이 아니어서 실망스러웠다. 달콤한 된장국이라니 말이 안 되는 거다. 배추 된장국의 맛을 글로만 읽고 상상하다가 끓인 탓이다. 가짜다. 도무지 올라갈 기척이 없는 아침 기온, 녹지 않는 눈, 길은 막히고 사람들 대신 물건들만 오간다.


눈이 그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마당에는 여전히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이사 온 첫 해, 폭설이 거듭 내렸다. 가파른 언덕길에 자동차들은 무용지물이었다. 학교도 빠지고 회사도 가지 않았다. 신이 났다. 집안에 갇혀도 좋기만 해서 눈에 집이 파묻혀도 신이 났다. 눈은 얼마나 좋은 핑계였던가.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란 한 마디로 모든 걸 멈추고 미룰 수 있었다. 눈은 금방 녹을 테고, 길은 열릴 거라서 불안할 이유도 겁을 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아마 그때도 누룽지를 끓이고 만두를 찌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며 된장국 끓이기에 실패했을 게 분명하다. 그냥 하하호호 웃어넘겼을 것이다. 달콤한 된장국도 있구나 하면서.



동생이 히아신스 구근 3 개를 주었다. 침대 옆 창가에 놓았다. 셋 중 하나만 잘 큰다. 초록색 잎을 밀어 올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꽃 봉오리가 보였다. 나머지 둘이 못나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데 도무지 변화가 없다. 비닐커버처럼 얇은 껍질에 쌓여서 눈을 내리감고는 나 몰라라 하는 품새가 마주 앉은 이가 영 못마땅한 듯하다. 어디에 닿을지 몰라 허둥대는 마음을 숨기려 애쓰느라 당혹한 구근이라니. 싹을 틔운 히아신스가 있지만 늦가을에 집안으로 들어온 화분들은 하나 둘 치워지고 있다. 벌써부터 겨울나기에 실패한 것이다. 물을 주는 방법을 바꾸고 이리저리 바람도 일으켜보지만 역부족이다. 조금 더 지치면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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