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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07. 2021

유월의 조각 - 마당에서 쓴 일기

6월 4일


  아름다움은 어쩌면 영혼이 아닐까? 영혼처럼 느려서 서두르는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 종내 그게 내 것이었다는 걸 잊고 마는 건 아닐까? 떠나온 곳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먼 도시에서 눈을 뜬 아침에, 내가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어쩌면 이름까지 잊었을 때, 그제야 '뭔가'를 놓쳤다는 생각에 허둥대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내가 두고 온 아름다움 한 조각이 집밥이 되고 고향이 되고 엄마가 되어 소비되는 동안, 그러니까 입으로만 그리워하고 돌아가거나 기다리거나 찾는 대신 여전히 앞만 보고 있는 동안에 해는 떴다가 지고 꽃은 시들고 벌은 붕붕거리고.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을 조금 더 자주, 많이 만날 것 같은 유월.


6월 8일


  처음 이사 왔을 때 데크 오른쪽에 서면 그네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키 큰 나무에 묶은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는 아이들 쪽에서 웃음소리가 우리집까지 건너오곤 했다. 그네가 사라지고 소년들도 떠난 자리에 빌라들이 들어섰을 때 시선 둘 곳이 없어 허둥댔지. 햇볕이 강한 오후에는 그늘도 짙어서 그네가 보였다가 다음 순간 사라졌다. 흔들리는 그네 따라 아이들 웃음소리도 높아졌다가 낮아졌고. 새로 지은 빌라에는 아이들이 살지 않는 모양이다. 뻐꾸기도 심심해서 졸기만 하고.


6월 10일


  찔레가 핀다. 무성해진 나무들의 가지를 잘라 바람길을 만든다. 분홍색 찔레 꽃잎에 머물던 바람이 목련과 매화와 배롱나무 사이로 빠져나간다.


6월 17일


어스름한 빛도 좋다. 일 년이면 서너 번 볼까 말까 한 말간 빛이 종일이었던 어제,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돌아다니다가 집에 오니 해가 넘어간 마당이 얼마나 편안하던지. 늦게까지 깨어있던 새들이 많았다.


6월 18일


  빗물이 요란하게 홈통을 따라 내려간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우당탕탕 서두르는 모양새가 보일 것만 같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확인한 시간은 채 다섯 시가 안되었다. 빗소리 들으며 잠을 더 잘까 일어날까 뭐하지 뒤척거리다가 어제 읽다 만 공선옥의 산문을 마저 읽기로, 아니 며칠째 끄적이던 글을 마무리하기로, 그러다가 한창인 수국들이 빗물로 머리가 무겁겠다고, 피기 시작한 델피늄은 운도 없다고, 콩꽃이 피었던데 그럼 콩은 언제 달릴 거냐고, 이런저런 요량들이 빗물처럼 춤을 춘다. 문득 꿈에서 오이들이 길게 자랐던 걸 기억해낸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작은 것들을 어제저녁에 봤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고말고.

불 켜고 책을 펴고 시계를 보니 7시가 훌쩍 넘어있다. 분명 4시 40분이었는데. 뭐할까로 두 시간을 넘겨 쓴 아침. 이걸 뭐라고 할까? 고장 나라! 핸드폰아! 아침 먹자.


6월 20일


  "올해는 수국이 많아서"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예전부터 꽃들을 말려보고 싶어서 해마다 헛된 시도들을 했었다. 시작은 꽃을 병에 담아두고 물 갈아주는 걸 잊고 시든 걸 보면서 시들었네 하고 그대로 지나갔다가 마침내 바사삭 말라 쪼그라든 장미를 자세히 보고 싶다 생각한 순간 훅 다가오는 향기에 놀랐던 때부터였다. 향기는 마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라벤더나 은방울꽃은 저절로 마르므로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되고, 장미는 형태를 잡아 말리기 어려우며, 꽃잎이 작으면 마르기 전에 오그라들기 쉽다는 것도 배웠다. 수국은 종류마다 다르다. 가지에 매달린 채 완벽하게 마르는 목수국도 있고 물에 젖은 빨래처럼 제모습을 잃는 수국도 있다. 제일 많은 실패에도 포기하기 어려운 게 수국이다.  오래 생각했던 건 한 번쯤 해 보는 게 좋다. 생각보다 쉬워 별게 아니군 할 수도 있고, 역시 안 되는군 하고 단념할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마음 건강에 좋다. 묵었던 휴지통을 비우는 정도의 효과가 분명히 있다. 어쨌거나 내 호기심에 희생된 올해의 첫 수국 송이들이 아까워 며칠 두고 보기로.




쏜살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날들입니다. 아무것도 못했는데 벌써 칠월이군 중얼거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에도 계절이 오고 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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