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는 잘 자란다. 손가락 두어 마디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올망졸망한 모종을 심느라 수선을 피우던 봄이 무르익어 작약이 스러지고 장미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면 상추는 절정에 이른다. 곱슬거리는 상추 잎을 모아 쥐고 레이스로 감은 꽃다발인 양 기꺼워하는 시기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머지않아 끄트머리에 작은 구슬들이 맺히는데 그건 상추 꽃이 곧 필 거라는 예고이자 보들보들한 상추 잎을 얻을 수 있는 날도 며칠이면 끝이 난다는 예고다. 새로 나오는 잎들이 작아지고 식감도 뻣뻣해진다. 아무리 상추라 한들 오고 가는 계절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봄이면 제일 먼저 상추를 심는다. 처음 모종을 심은 후에는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살핀다. 상추는 보통 사월 하순에 심지만 올해 사월은 마치 초여름 같아서 조금 일찍 심었을 것이다. 날씨는 오월까지 널뛰기를 해서 때로 서리가 내렸고 비가 오면 오히려 추워졌다. 계절이 지나온 저편으로 다시 돌아가려나 싶었다. 하루 걸러 내린 비는 봄을 부르는 비가 아니라 식물의 성장을 멎게 하고,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비였다. 오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찬 기운이 사라졌다. 좀처럼 자라는 기미를 보이지 않아 답답했던 상추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늦은 걸 만회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맹렬히 자라서 상추를 심은 화단은 곧 소인국의 숲처럼 무성해졌다. 아침저녁으로 상추 잎을 따기에 바빴다. 하루 걸러 상추쌈을 먹고 모든 샐러드에 상추를 넣기 시작했다.
이사 온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아랫집 아저씨가 산 쪽으로 난 옆문으로 들어와서 마당에 있던 내게 상추를 안겨주고 돌아갔다. 그날 점심에 상추쌈을 먹으며 우리 마당에도 상추를 심어야겠단 생각을 처음 했을 것이다. 이듬해 봄, 모종 가게에 가서야 상추가 한두 종류가 아니란 걸 알았다. 아무 때나 심으면 안 된다는 것도, 봄 한 철 먹을 수 있을 뿐 금방 세어 버린다는 것도,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어느 순간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구근을 묻고 봄이면 상추를 심었다. 상추는 사월에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고 오월에는 어여쁘게 접시에 담겨 상에 오르다가 유월이면 눈만 마주쳐도 절로 한숨이 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상추쌈, 상추 샐러드, 상추겉절이에 질려 있던 어느 날 상추튀김이란 게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유명한 분식집 메뉴라고 했다. 상추로 튀김을 한다고? 깻잎도 아니고 그렇게 물기가 많은 상추로 튀김을 어떻게 할까? 궁금하면서도 신이 났다. 상추를 튀기는 게 아니라 튀김을 상추에 싸 먹는 것이란다. 상추떡도 있다는 데 그건 어떤 맛일까 잠시 궁금했지만 상추 잎을 넣고 만든 떡이라니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흐물거리는 상추 잎이 보이는 듯해 저어하는 마음이 먼저 차올랐다.
별 수 없이 또 상추겉절이를 만든다. 상추를 한 양푼 뜯어서 찬물에 담갔다가 씻는다. 물기를 거둔 상추에 간장과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을 뿌려 휘리릭 무친다. 금세 숨이 죽으니 식구들이 자리에 앉을 때 무쳐서 바로 올린다. 그 짧은 동안 내 몸 안에는 엄마가 있다. 상추겉절이를 자주 만들었던 엄마는 상추를 자르지 않고 온전히 사용했다. 마치 깻잎김치를 담는 것처럼 상추를 한 장 펴고 양념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상추를 올리고 양념을 바르는 식이었다. 여전히 음식 만들 때 양념을 아끼면 뭔 맛으로 먹느냐는 엄마이고 보면 아마 상추겉절이에도 간장과 고춧가루와 깨소금이 듬뿍듬뿍 얹혔을 터였다.
지금도 상추겉절이란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간장과 고춧가루가 섞인 양념 냄새가 어딘가에서 풍겨온다. 그러니까 내게 상추겉절이는 맛이 아니라 냄새로 기억되는 음식이다. 상추겉절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서늘한 부엌 벽 쪽에 놓였던 나무 찬장의 문을 열면 훅 끼쳐오던 짭조름한 냄새가 훅 끼쳐온다. 물기를 뺀 상추를 서너 번 자른 후에 양념을 뿌리고 펼친 손가락으로 뒤섞어 들어 올릴 때마다, 채친 오이와 양파를 고명처럼 흩뿌릴 때마다 엄마 냄새가 퍼진다. 좋아하거나 좋아했던 기억은 없는데 냄새만 생생해서 마치 내가 엄마의 찬장에서 상추겉절이 냄새만 훔쳐온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집에 엄마가 없으면 배가 고팠다. 그게 실제의 허기였는지 엄마가 없는 집안의 휑뎅그렁한 기분 탓이었는지 분명치는 않다. 초등학생인 나는 부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둑한 부엌에 서서 찬장 문을 옆으로 밀어 열면 거기 상추 겉절이가 있었다. 아니 상추 겉절이의 냄새가 있었다. 분명 찬장 안에 상추 겉절이만 있었던 게 아닐 텐데 내가 기억하는 건 상추 겉절이 냄새가 전부였다. 상추 겉절이가 없는 날에도 냄새는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려고 찬장을 연 사람 같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냄새를 몇 번 맡고 나면 다시 힘이 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냄새가 코끝에 맴돈다. 간장에 고춧가루가 섞인 매콤하고 짭짤한 양념 냄새는 점점 진해져서 나를 감싸고 책상 주위로 퍼져나가 마침내 방 안 전체로 퍼진다. 숨이 죽은 상추가 납작하게 누워있던 접시에서 풍기던 짠 냄새를 엄마 냄새처럼 맡았던 날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엄마의 찬장이 있었다. 찬장을 열 때마다 상추겉절이의 냄새가 났다. 그런 날은 배가 고팠고, 엄마는 없었고, 나는 어린애였다.
양념을 듬뿍 얹은 상추가 금방 숨이 죽는다는 걸 엄마가 몰랐을 리 없다. 엄마는 남은 상추 겉절이를 왜 찬장 안에 넣어두었을까? 상추 겉절이는 왜 항상 몇 장씩 남았을까? 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이 만들었을까? 찬장 속에 남아있던 상추 겉절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그렇게 흐물흐물해진 상추를 누가 먹기는 했을까? 음식에 까다롭던 엄마가 그걸 왜 보관했을까? 엄마가 상추겉절이를 만들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만들기 쉬운 반찬이라서? 빈약한 밥상을 풍성하게 보이려고? 혹시 엄마도 상추를 길렀을까? 엄마도 나처럼 신부의 꽃다발 같은 상추 잎에 반했던 걸까? 엄마는 그걸 좋아했을까? 엄마도 상추 겉절이를 만들면서 엄마의 엄마를,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 생각을 했을까? 엄마도 상추 겉절이를 냄새로 기억할까? 엄마도 찬장 문을 열고 엄마를 찾았을까? 혹시, 정말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