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린다. 가끔 이용했던 채소 쇼핑몰이다. ‘매일 아침 수확하고 세척하여 보내드리는 싱싱한 루콜라’를 주문하라는 안내 문자다. 기온이 부쩍 내려가 서리가 내릴 지경인데 ‘아침에 수확한 싱싱한 루콜라’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엊그제 마트 과일코너에서도 딸기가 그렇게 탐스러웠던 걸 보면 이제는 제철 과일이나 제철 식재료 운운하는 것도 세상모르는 소리일 것이다.
여름내 루콜라가 자라던 화분에서 연둣빛 새싹들을 다시 발견한 게 며칠 전이다. 날이 벌써 추워졌으므로 제대로 자라서 식탁에 놓일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철 모르고 돋아난 그것들을 차마 뽑아버릴 수 없어 그대로 놔두었다. 루콜라는 마트에 가면 일 년 내내 볼 수 있는 채소다. 나가기가 귀찮다면 핸드폰을 열고 단 몇 분 만에 루콜라 한 묶음을 배달시킬 수도 있다. 다음날 아침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겨 도착한 그것은 마당의 비좁은 화분에서 자라던 시간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나의 루콜라’와 꼭 같을 것이다. 모기에 물리고 손톱 사이에 끼인 흙 알갱이를 씻던 부산함이나 구름 사이에서 쏟아져내리던 여름을 능청스레 감추고 말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겠지.
씨앗들은 오래된 티백 상자에 들어있다. 서재 구석에서 잊힌 채로 겨울을 난 상자가 거실로 나오는 때는 삼월말 혹은 사월초다. 새싹들이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봄이라고 하기는 일러서 마당이 여전히 흙빛을 벗어나지 못한 계절, 작약의 붉은 싹이나 상사화와 수선화의 손톱만 한 초록색 잎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조바심을 억누를 수 없을 때 씨앗 봉지들을 모아 둔 상자를 뒤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올봄에 뿌린 씨앗 중 루콜라가 있었다.
씨앗을 뿌린 지 삼일 만에 싹이 났다. 본잎이 나올 때까지 거실에 놔두었다. 새싹들은 너무 작아서 제대로 자라기나 할까 싶지만 그건 헛된 염려에 지나지 않아서 우리들은 아침마다 작은 탄성을 지르며 즐거웠다. 투명한 싹이 차츰 통통해지고 색이 진해지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놓여 불안함은 생겨났다가도 이내 사라졌다. 봄 서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온화해진 날, 수련을 띄웠던 커다란 고무 화분에 모종들을 심었다. 기온은 여전히 오르내렸고 장마처럼 비가 연일 내리기도 했다. 서리를 남겨둔 심술궂은 아침도 있었다. 옮겨 심은 후 꼼짝 안 하던 루콜라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 건 오월도 중순에 접어들어서였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을 확인하고 종이 상자로 만든 이불을 덮어주던 극성이 필요 없게 되자 염려도 관심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튤립과 수선화, 물망초와 모란, 작약에 한눈을 파는 동안 루콜라는 상추와 파슬리 같은 채소들과 어울려 스스로 자랐다. 마당에서 상추와 루콜라를 수확하기 시작한 건 오월 하순부터였다. 첫 수확의 감격은 금세 사라진다. 상추며 오이 등이 한창일 때는 미처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라서 아무리 쌈을 싸고 샐러드를 먹어도 여전히 남아돈다. 마당의 채소들을 배반하면 안 되니까 하는 마음으로 매일 상추를 거두고 루콜라를 자르다 보면 어느새 한여름이다. 루콜라는 상추만큼 많지는 않지만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짧아서 더 신경이 쓰이게 마련인데 요리책에서 루콜라를 듬뿍 넣는 샐러드 레시피를 찾기라도 하는 날이면 신이 나서 필요한 양보다 넘치게 자르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먹는 속도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 급기야는 마당에 나가서도 루콜라 정도야 하고는 바라보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루콜라는 쑥쑥 자라서 작은 덤불을 이루더니 마침내 꽃이 피었다!
루콜라의 꽃
루콜라의 잎은 열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맛도 그렇다. 알싸하지만 물기가 많은 풋내 대신 고소한 맛이 난다. 꽃 모양도 비슷하다. 다만 무꽃이 연보라색이라면 루콜라의 꽃은 노란색이 섞인 크림색이다. 봄날의 프림로즈가 사그라질 즈음의 빛바랜 노랑이다. 빈혈을 앓고 있는 소녀를 연상하게 하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깔의 꽃잎은 그러나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자리가 뜯긴 것처럼 매끄럽지 못한 데다가 꽃술에서부터 보랏빛을 띤 검은 선이 꽃잎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마치 늙은 여인의 손등에 도드라진 혈관처럼 보인다. 오래된 박엽지처럼 만지면 금세 부서져버릴 것 같은 꽃잎은 그러나 기이하게 아름답다. 꽃을 처음 발견했던 날,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며 설레던 아침과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도 작은 잎들에 압도당했던 아침들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마당에 나갈 때마다 루콜라가 살고 있는 화분 앞에서 꽃을 살폈다. 처음에 꽃봉오리는 여럿이 뭉쳐 있었으나 꽃이 필 때는 바로 옆 봉오리들과 떨어져서 줄기를 따라 한 송이씩 홀로 핀다. 제멋대로 구부러져 옆에서 자라는 고수와 얽히기도 하고 옆 화분의 상추와 대파 사이로 뻗어나가기도 한 줄기는 발레리나의 손끝이 허공에 그리는 선처럼 나른하게 아름다웠다. 여름 끝에 그만 루콜라 꽃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영혼이 아닐까? 영혼처럼 느려서 서두르는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 마침내 그게 내 것이었다는 것마저 잊고 마는 건 아닐까? 떠나온 곳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먼 도시에서 눈을 뜬 아침에, 내가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어쩌면 이름까지 잊었을 때, 그제야 '뭔가'를 놓쳤다는 생각에 맞닥뜨린다. 그리워하고 돌아보며 아쉬워하는 동안에도, 몸은 앞으로만 나아가려 허둥대던 그 여름에도 해는 맹렬하게 떴다가 지고 벌들은 붕붕거렸으며 꽃들은 연신 피고 졌다. 마당의 일이란 게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라 그치지 않는 비에 토마토가 멍이 들고 애벌레들이 장미 봉오리를 먹어 치운 걸 볼 때면 맥이 풀린다. 이제 아무것도 심지 않을 거라고, 알아서 나고 스스로 자라게 놔둘 거라고 중얼거려도 보지만 그 말을 내뱉은 바로 그 순간에 그럼 오글오글한 싹들은? 토마토 잎에서 나는 여름 냄새는? 루콜라 꽃들은? 화르륵 떨어진 꽃잎들이 만든 작고 슬픈 무덤들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꽃은 없어도 살고 채소들이야 마트에서 사는 게 더 싸고 좋을 거라 우겨도 낮잠 끝의 푸념처럼 아무도 듣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다. 어떤 아름다움은 발견하는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이라 시장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집은 아침마다 안개에 둘러싸인다. 해가 떠올라 기온이 오르면 부드럽고 온화한 가을빛이 마당에 가득 찬다. 나무들은 아직 물들지 않았으나 이미 잎 속에 겨울을 받아들였다. 나무들이 얼마나 간단하게 놓아버리는지는 가을이 깊어진 어느 아침에 갑자기 알게 된다. 거기 앙상하게 변해버린 나무가 모든 것을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모습에서 배운다. 그러므로 이 계절에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다만 삶을 계속하는 것이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면서 내 주위의 질서와 평화를 가꾸면 된다. 마당은 눈에 덮일 테고 루콜라는 돌아오는 봄에 다시 심으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걱정하고 또 걱정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른거리는 가을 햇빛이 나를 끌어당긴다. 자기처럼 되라고 속삭인다. 그러니까 가버리게 놔두라고. 그대로 보내버리라고. 가벼워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