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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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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09. 2022

봄 뜰

봄은 더디게 왔다. 기온은 느릿느릿 올라갔다가 갑자기 확 떨어지곤 했다. 오후가 되면 여지없이 바람이 불었다. 노란 햇빛에 이끌려 뜰에 내려섰다가도 오래지 않아 아랫집 지붕을 타고 솟구쳐 오르는 심술궂은 바람에 쫓겨 들어오기 일쑤였다. 해가 집 뒤로 넘어간 오후의 실내는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겨울이면 겨울이고 봄이면 봄이지 이게 뭐야. 봄인 줄 마음을 놓았더니 겨울이잖아. 이래서야 올해도 수국 보기는 글렀네. 지난 늦가을 택배박스와 마른 밤나무 잎으로 뜰의 수국을 감쌌다가 바로 며칠 전, 그러니까 삼월도 하순에 접어들 무렵에 더 놔뒀다가는 땅에서 올라오는 봄기운에 꽃눈이며 새잎들이 데친 나물처럼 흐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식물들의 겨울 옷을 모두 벗겨낸 남편이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봄은 이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로를 따라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적거리며 천천히 올라왔다.  버스 정류장을 건너 작은 다리를 넘고 야트막하게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서 숨을 몰아쉬고 동네 어귀 키 큰 나무 아래 주저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봄은, 고개 넘어 탄천 옆  버드나무에 연둣빛 작은 이파리가 돋아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무거운 몸을 다시 꿈틀거렸다. 골목을 돌아나갈 때나 오르막길에 접어들 때마다  멈춰 서서는 뜸을 들이며 뜨뜻하고 축축한 기운을 감질나게 풀던 봄이었다. 그러던 봄이 겨우내 메마른 흙먼지만 날려 보내던 동네 공동 텃밭이 말끔해지고 비료 포대가 곳곳에 쌓이며 오이와 고추 지지대가 만들어지자 서두르는 품새가 역력하다. 오래된 연립주택 울타리가 산수유나무였음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놀라 멈추고, 가파른 언덕길 중간쯤에 거대한 목련나무 그늘 밑에 닿아서는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목련에 감탄하는 중이라고 우기며 한 걸음씩 올라 기어이 왔다.




  크로커스들은 이미 졌다. 히아신스가 피고 튤립은 봉오리들이 올라왔다. 앵두꽃이 피는구나 했더니 목련도 매화도 한창이다. 조팝에 꽃봉오리가 생겼고 풀또기는 하루 이틀 새에 꽃망울을 터뜨리게 생겼다. 부추를 한 번 잘랐고 오늘은 두릅도 땄다. 며칠 전 물 주다가 호스에 걸려 넘어졌는데 양쪽 무릎에  멍이 들었다. 푸른 멍이 검게 변했다. 멍이 사라지면 여름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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