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중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Jun 11. 2022

5월의 뜰

마당에서 잡은 찰나

5/1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물망초 덤불을 뛰어넘으며 놀고 있다. 꽃이 떨어지고 줄기가 부러진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높이뛰기를 하다가 씨름도 한다. 뒹굴고 뭉개고 잡아뜯는다.


어쩌면 꽃들도 그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어서 오세요. 오월.

뜻대로 하시길.



5/12


  고수를 먹을 때가 왔다. 양상추 잎이 동그랗게 모이고 상추가 매일 상에 오른다. 첫물 부추로 담근 부추김치가 어제 바닥났고 오이소박이는 벌써 다 먹어버렸지. 명이로 만든 장아찌는 귀한 반찬이라 두 집  엄마에게 나눴다. 장아찌 통이 비면 곰취로 채워야지. 생각도 않았던 곳에서 쪽파, 깻잎 등이 보인다. 완두와 라즈베리에 꽃이 피고 앵두가 다글다글하다. 튤립 지고 어제는 장미가 폈다. 매일 바뀌는 식물들이 나를 끌고 간다. 토마토가 떨어졌던 자리에서 토마토 싹이 나왔는데 그 당연함이 몹시 새삼스러웠다. 마당이 제일이다. 그런데 손에서 나는 고수 냄새는 언제 사라질까?





5/14


  어떤 이유로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은 하는 게 좋다. 시간이 걸려도, 품이 들어도 그렇다. 혼자 할 수 없으면 도움을 청해서라도. '서두르지 말고 손을 써서 직접 할 것'이 원칙이다. 매일의 즐거움을 한 접시의 맛과 몇 그루의 나무와 담벼락에 내려앉은 햇볕과 함께 할 것. 그래서 이번 주말의 할 일은 책장 바꾸기와 부추 겉절이 담그기.


이른 봄에 담은 명이 장아찌



5/16


친구와 헤어진 후 건물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눈에 들어온 오월의 붉은 장미. 장미가 흐드러진 어느 집 담장 옆을 나란히 걷다가 누군가가 비틀거렸는데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 "취했어?" 그것 봐. 정확히 기억하고 있잖아. 바람에 라일락 잎들이 흔들리던 것도,  비 오던 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한쪽 어깨를 적시던 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만두를 사이에 두고 웃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다고. 오늘의 생수 한 잔과 가는 손가락도 오래오래 기억할 거라고.




5/17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라이너 쿤체, <은엉겅퀴>


마가렛, 은방울꽃, 장미와 화분



  은엉겅퀴는 민들레처럼 낮은 키에 딱 한 송이 흰색 꽃이 피는 엉겅퀴라고 한다. 보호종이다. 흔하지 않다는 뜻이다. 식물계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하니 인간계에서는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면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있거나 몸을 가능한 작게 만들어야 아니 아예 땅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납작해진 채 남들이 만든 그림자 속에서 빛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송이 은엉겅퀴가 될 수도 없고.



5/23 아침



꽃잎들을 모으고 아끼는 일 따위,

그런 건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머리카락 속에 기꺼이 날아든 그 꽃잎들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낸다.

그리고 사랑스런 젊은 시절을 향해

새로운 꽃잎을 달라고 그의 두 손을 내민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건, 동경> 중에서


5/23 저녁


  가지 꼭지를 자를 때는 조심해야 한다. 뾰족한 가시에 언제 찔릴지 모른다. 매끈거리는 가지를 흐르는 물에 씻어서 네 등분한다. 하얀 속살이 탐스럽게 드러난다. 가지 토막을 세워놓고 세로로 네 등분, 통통한 부분은 여섯 등분한다. 굵은소금을 뿌려 15분 정도 놓아둔다. 소금이 녹으면서 가지에 물기가 생긴다. 가지 네댓 조각을 쥐고 물기를 짠다. 잘 안 짜진다. 두 손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고개를 외로 꼬고 몸을 기울여 애를 써보지만 별무소용이다. 오른쪽 골반을 싱크대에 붙이고 역시 오른쪽 팔꿈치를 싱크대에 거의 닿을 정도로 비틀어 힘을 줘본다. 허리를 비튼다. 다리 하나가 들린다. 온몸을 싱크대에 던져 넣다시피 힘을 손바닥으로 모은다. 절인 가지의 물기를 짜는데 온 몸이 필요하다니. 남편을 부른다. 이것 좀 짜 봐요. 남편은 두 손만으로도 가지의 물기를 짤 수 있다. 어깨도 다리도 비틀지 않는다. 오히려 힘이 지나쳐  뭉개진 가지 조각도 있다. 힘 조절이 안 되는 탓이다. 한 사람은 온몸을 쥐어 짜야하고 한 사람은 힘을 절제해야 한다.


절인 가지와 떨어진 장미 꽃잎



5/29


  걸어서 돌아오는 길이 좋다. 복잡한 길을 걷는 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달리는 자동차들과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지나치는 걸 겁내지 않기를 바란다. 저녁이 오면 더 좋다. 사람들을 자세히 볼 수 없어서 그렇다. 걷는 이들은 무엇엔가 쫓기듯이 점점 더 빨리 나를 지나친다. 다가온 순간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다. 그런 시간에는 아무도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니 내가 그곳에서 무얼 하는지도 전혀 모른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이들은 사랑스럽다. 그 순간에 일종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걸 보면서 행복하다.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를 혼자서 걸으며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이 여전히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아무도 나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을 본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바람이나 바다가 되는 느낌이다.


지나고 보니 즐겁기도 슬프기도 한 날이었어요




5월의 짧은 일기들을 모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떻게 지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