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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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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16. 2023

우리 함께 눈을 치울까요?

   문자 알람이 울렸다. '새벽부터 내린 눈과 한파'로 시작하는 안전안내문자였다. 누운 채로 커튼을 열어젖혔다. 나무들과 윗집 담장 위로 쌓인 눈이 보였다. 제법 큰 눈송이가 춤을 추듯 날아올랐다가 둥근 호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주말이라 골목은 조용했다. 아직 이른 시간, 아직 아무도 눈을 치우러 나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눈의 냄새를 맡았다. 차고 적막한 냄새. 잠자던 기억 하나가 깨어났다.


   지지난해였던가. 어느 날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여느 해보다 추웠지만 눈이 쌓일 정도로 내린 적이 없었기에 내심 반가웠다. 눈이 많이 오면 내 방 창가에서도 산비탈에 눈이 쌓이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고라니가 눈 위로 작은 발자국을 내며 다가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용하고 무심한 눈이었다. 벼르던 눈 구경을 포기하고 읽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으나 몇 개의 눈송이가 무심한 듯  나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넉가래로 눈을 미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앞 골목을 내려다보니 앞집 미루 아빠였다. 눈이 언제 이렇게 왔지?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이 넉가래 앞에 점점 높게 쌓여갔다. 골목을 오가며 홀로 눈을 치우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진지함이 배어 나왔다.     

 

  지금 살고 있는 골목으로 가장 먼저 이사를 온 건 우리였다. 그러니 우리 가족이 골목 주민의 전부인 셈이었다. 빈 집 중 한 곳의 차고가 분양사무실로 쓰이고 있었으므로 그때 내게는 분양사무실 직원들이 이웃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소리 높여 인사를 했지만 오가는 이들이 없는 골목은 대체로 조용했다. 누군가 비어있는 집을 보러 오기라도 하면 조용했던 골목은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처럼 활기를 띠었다. 혹시 그중 누군가와 이웃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로서도 마냥 무심할 수만은 없어 공연히 밖에서 서성이며 집을 보러 온 이들을 흘깃거리곤 했다. 그렇지만 도심에서 벗어난 데다가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기에 어려울 만큼 좁은 언덕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어서인지 이웃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사 온 집에 왔던 지인들은 빈 집들 사이에서 사는 게 무섭거나 쓸쓸하지는 않은지 염려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골목 전체가 내 집인 양 편하게 지냈으며 이웃들이 생기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때 우리가 이웃 없는 골목에서 평온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매일 ‘처음’을 마주하느라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에 내어 줄 자리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하굣길에 난생 ‘처음으로’ 뱀을 보았다고 했고, 나는 흙을 밀고 올라오던 두꺼비와 ‘처음으로’ 맞닥뜨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리창에 나무들이 비친 것도 모르고 직박구리가 날아들다가 머리를 부딪고 떨어지기도 했는데 죽은 줄 알고 다가갔다가 정신을 차린 새가 비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걸 보고 ‘처음으로’ 새들도 기절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늦가을이면 경사면에서 살진 꿩들이 푸드덕거리고 다람쥐들이 나무를 기어오르는 걸 본 것도 ‘처음’이고, 전화를 걸어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나갈 수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신났던 것도 ‘처음’이었다. 우리가 마주했던 풍경들이 머지않아 옛날이야기처럼 들리게 될 거란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 수 없었다.   

  

   비어있던 집들 모두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겨울을 두 번이나 지낸 후였다. 분양 사무소는 철수했고 진짜 이웃들이 생겼지만 골목은 전보다 오히려 조용했다. 낮의 골목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주민이었다. 모두들 바쁘거나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닫힌 대문이 열리는 건 한겨울에 길이 막힐 정도로 눈이 내려 쌓일 때라든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지하수 설비에 문제가 생길 때였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주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꺼이 눈삽이나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치웠다. 하루 종일 눈이 오면 수시로 드나들며 밀고 쓸어 길을 텄다. 겨울이면 우리는 눈을 치우면서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오는 이들의 얼굴에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걸려있곤 했다. 겨울이면 왁자지껄 즐거워지는 골목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비교적 고즈넉해서 우편물을 가지고 오거나 도시가스 검침을 하러 오는 이들에게도 절로 반색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목의 평화로운 일상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깨어졌다. '거리 두기'라는 낯선 단어가 익숙해질 무렵 봄이 왔으나 골목은 매일 점점 더 조용해졌다. 외출을 하려다가도 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으면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겨울이 왔고 눈이 쌓였지만 이제는 모여 떠들며 한바탕 눈을 치우는 대신 번갈아 나와서 묵묵히 각자의 집 앞을 청소했다. 미리 정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마주쳤을 때는 당황한 나머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각자의 집안으로 뛰어들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인사를 나눴다.


   바이러스와 함께 보내게 된 두 번째 겨울, 남편은 마당의 나무에 크리스마스 전등을 걸었다. 저녁 설거지를 할 때마다 전구가 반짝였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옆집 벚나무가 우리 집 주목처럼 반짝거리고 있는 걸 알게 되자 쓸쓸함은 사라졌다. 뒤이어 골목 첫 집에서도 나무들에 전구를 달았다는 걸 알게 됐다. 어둠이 내리면 약속이라도 한 듯 울타리와 현관에 불을 밝히는 집들이 늘어갔다. 우리 집 마당에 불을 켜면서 골목 전체가 반짝이겠거니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말소리,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늦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불빛들을 마주하면 뜻밖의 초대를 받은 것처럼 설렜다. 닫힌 문 뒤에서 수줍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우리는 잘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요?”    

 

   코와 입을 가리고 손을 맞잡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 그리움을 새롭게 배웠다. 소라게처럼 숨어 살던 사람들이 불을 밝혀 신호를 보내왔다. 닫힌 창문 뒤에 말없이도 안부를 주고받는 이들이 있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골목을 지나다가 동네 길고양이들을 마주치면 차창을 내리고 말을 건넸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고.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혹시 닫힌 커튼 뒤나 나뭇가지 너머에서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게 코로나 시대를 건넌 우리들의 인사법이었다.


   눈이 약해졌다. 넉가래를 밀어 치울 정도로 내리지는 않았으니 오늘도 골목은 조용할 것이다. 거실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작은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다. 며칠 전 저녁 늦게 돌아오다가 골목 첫 번째 집 정원에 오색 전구가 불을 밝힌 모습을 보았다. 올 겨울에는 함께 눈을 치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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