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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02. 2022

일상은 매력이 없다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창밖이 휑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랗게 빛나던 메리골드가 축 쳐졌다. 마당을 훑는 바람이 빈집을 드나들듯이 거침없다. 가끔 작은 박새가 날아들어 고양이 밥그릇을 기웃거린다. 이런 풍경이 얼마만인가 싶다가 고개를 흔든다. 그게 아니란 걸 깨닫기는 어렵지 않으니까. 마당은 한결같지 아니한가. 새삼스러운 건 풍경이 아니라 바로 나다. 창문 밖의 남루한 계절이 반가워서 좀처럼 싱크 앞을 떠나지 못한다. 매일 서는 곳, 매일 바라보는 나무들, 매일 사용하는 접시와 유리잔까지 오늘은 다시 보인다.


  12월이다. 겨울이 다시 왔다. 찬 공기 탓인가 정신이 좀 드는가 싶다. 밥 먹고 책 읽는 게 제일 큰 일이었던 사람이 밥과 책을 뒷전으로 미루고 살았다. 밥과 책, 내 일상, 매력은 없지만 싫증도 나지 않는 것. 돌아보니 여전히 내 곁에 있네.


"희망은 새 옷이다. 빳빳하고 매끄럽다. 그러나 한 번도 입어본 적 없어서, 입으면 얼마나 어울리고 얼마나 잘 맞을지 모른다. 기억은 치워둔 옛날 옷이다.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맞지 않는다. 사람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반복은 해어질 수 없는 옷이다. 탄탄하면서도 부드럽게 감싸준다. 꽉 끼지도 않고 헐렁하지도 않다. 반복이 무언가 새로운 것이리라 상상하며 자신을 숨기지 않는 사람만이 정말로 행복해진다. 그렇게 상상으로 자신을 속이면, 반복에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한병철, [리추얼의 종말]에서 재인용)


  

   계획한 건 아니지만 겨울이면 한병철을 읽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병철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느리고  고요하게, 지나간 열한 달이 어땠는지에 상관없이 겨울이 다시 왔다는 걸 기뻐하면서, 그 즐거움을 들키지 않으려 깊은 밤 조용하게 책장을 넘기는 나를 흘금거리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그러니 한병철은 내게 겨울의 리추얼이다. 달력의 마지막 한 장,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이는 장식들, 선물 포장, 계피와 육두구의 냄새, 그리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까지.


어서 오세요.

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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