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봄이 온 것처럼 온화한 날씨는 믿을 게 못되었다. 주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주목이 순식간에 눈으로 뒤덮였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마당에 눈이 베일처럼 휘날렸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서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나뭇가지들은 아직 눈을 뒤집어쓴 채였다. 옹이가 진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바라보다가 중학교 미술시간에 그렸던 크리스마스 카드가 떠올랐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산 카드는 반제품이었다. 반으로 접힌 카드에 나무나 교회 같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밑그림에 색을 입히거나 다른 그림을 더하는 등의 방법으로 카드를 완성하면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림의 가장자리를 초록색 물감으로 한 벗 덧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색색의 물감으로 교회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동안 나는 반으로 접힌 카드 안쪽 면에 편지를 썼다. 그때 내가 만들었던, 아마도 반에서 제일 단순했을 카드 속의 나무가 몇 십 년이 지나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느낌이었다. 메두사의 머리처럼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눈을 뒤집어쓴 모습이 아침에 본 광고에 겹쳐졌다.
'좋은 책에 투자하는 당신의 안목'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북펀딩 안내 메일이었다. 분석 심리학자인 칼 융이 치료했던 환자들이 그린 그림과 그 분석을 담은 책들이라고 했다. 환자들이 그린 그림은 '구체적 상실의 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자기 탐구의 표현'이라는 어구가 세탁실 맞은편에서 비스듬히 가지를 뻗은 나무와 오래전 미술시간에 그렸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연결시킨 고리였다. 만약 융이 내가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최소한의 덧칠이 전부였던 그림으로 들여다보는 나의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또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까?
내게 묻지 않는 이들이 고맙다. 그들의 침묵이 무관심이나 외면이 아니라 배려인 걸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덮는 눈으로도 가리지 못한 나뭇가지처럼 모르는 채 남겨두고 싶은 나의 부분들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모든 걸 알고 난 후에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