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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08. 2023

오늘 밤, 파티를 잊지 마세요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오십이 넘었다. 분홍빛 얼굴이 섬세한 그녀는 앓고 난 후로 아주 창백해졌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며 심장까지 약해진 상태지만 오늘 밤 열리는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나온 참이다. 세계 1차 대전과 스페인 독감이라는 끔찍한 세상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클라리사 앞에 유월 아침의 상쾌하고 신선한 런던이 놓여 있다. 그녀는 마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바닷가의 아이들에게 찾아오던 아침처럼-유쾌하고 신선한 아침에 가볍고 발랄한 어치새 같은 몸짓으로 길을 걷는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가로지르고 피카딜리의 해처드 서점을 지나 본드 가에 있는 꽃집에 가는 동안 클라리사는 30여 년 전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오래전 그들이 서있던 곳과는 다른 길의 끄트머리에 서서 지난날을 돌아보는 클라리사가 이제 확인한 것은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자신을 포함해서 -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 삶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사랑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이것, 그녀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란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앓고 난 후의 느낌이 매혹적으로 집약된 [댈러웨이 부인]의 도입부다.


    클라리사는 비난하거나 이해하려고 애쓰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런 일들이란 '누군가를 찾아가고, 명함을 두고 오고,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꽃다발이나 작은 선물을 들고 다니는 일들이다. 모모 씨가 프랑스에 간다고 하면, 공기베개가 있어야 해! 하는 식’이다. 얼핏 사소하고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이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라리사는 작은 것들로도 삶을 가꿀 줄 알았다.  당연히 그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시절 그녀를 숭배했던 피터의 말대로 그녀가 사실은 지독한 회의주의자이고 신이란 건 믿지 않으며 도덕적인 잣대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가 그녀가 지독한 인플루엔자를 이겨냈기에, 그리하여 삶이란 것이 얼마나 위태롭게 이어지는지를 새삼 알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면 당신은 고개를 끄덕일까? 클라리사가 여는 파티의 초대장을 기다릴까?


   삶은 마음먹은 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얼음장을 밟듯이 조심조심 내딛어도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난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역시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일상이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첫해에는 봄을 도둑맞았다고 했다(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는 얼마나 순진했는지).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예매해 두었던 공연은 취소되었다. 도서관과 공원이 문을 닫고 뒤이어 공항이 폐쇄되었다. 외출할 때마다 여분의 마스크를 챙겨야 했고, 어쩌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마스크를 찾아 허둥댔다. 아침마다 전날 새로 감염된 사람들의 숫자가 발표되었다. 건물이 폐쇄되고, 카페와 식당은 초저녁부터 문을 닫았다. 심지어 가까운 이들의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우리를 가장 두렵게 했던 건 누구도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3년을 살았다. 이제 국경은 다시 열렸고 북적이는 공항에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마스크를 찾아 내달리지 않는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할 때의 약 광고


   만약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때 클라리사가 우리를 봤더라면 뭐라고 했을까? 우리가 침몰하는 배에 묶인 저주받은 족속이고, 이 모든 것은 시시한 농담에 불과하여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동료 죄수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지하 감방을 꽃으로 장식하고 가능하면 의젓하게 굴자고 미소지었을까?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악당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도록?


언니 바네사가 디자인한 [댈러웨이 부인]의 초판본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서 시장과 서점과 우체국이 있는 시내에 가는 것이었다. 책을 담은 갈색 종이 가방의 냄새를 맡고. 양손에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리 지어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주 앉은 이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높인 음악을 뚫고 묻고 또 물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실제로는 핸드폰을 열어 손바닥만 한 화면을 노려보며 쇼핑을 하고 택배상자를 정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또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는지. 만약 그때 클라리사가,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가 알았던 걸 - 운명에 맞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 나도 알았다면 달랐을까?  삶이란 그야말로 납득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해서 생각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는 단순 명쾌한 명제 하나.  


   버지니아 울프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가 회복했다. 1918년에는 ‘ 8일 동안 침대에 있었다. 펜과 이혼했고 삶의 전체 흐름이 끊겼다’고, 1919년에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쓰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삶에 대한 애정만큼은 넘쳐났던 작가는 1925년 [댈러웨이 부인]에서 전쟁과 인플루엔자를 지나온 이들의 고통과 기쁨을 독자들 앞에 나란히 놓아둔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2차 대전을 앞두고는 지난 전쟁(1차 대전)을 떠올리며 두려웠으나 다가올 재난에 움츠러드는 대신 바로 앞에 놓인 날들과 곁에 있는 사람에 더 마음을 쏟았다. 유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르고, 인생이 완전히 붕괴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하지 않겠다고. 새 방, 새 의자, 새 책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쓴다. 풀잎 위의 한낱 풀벌레에게 달리 할 일이 뭐 있겠느냐는 것이다.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실컷 먹고, 마시고, 웃고,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자, 고 생각한다. 이상한 노릇이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바보 같은 말들을 하고, 사람들이 죽음을 하찮게 알고, 몽테뉴가 말한 것처럼, 처녀들과 유쾌한 젊은이들과 웃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1932년 8월 20일의 일기



1939년의 버지니아 울프


   2차 대전을 목전에 둔 1939년 8월 24일의 일기에는 식량을 두 배로 주문하고, 약간의 석탄도 주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9월 6일에 첫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읽고 쓰는 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1940년 3월 29일에는 더 이상 미래와 싸우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말자고 쓴다. 자신은 봄을 즐길 자격이 있노라고. 누구에게도 빚이 없고 써야 할 편지도 없고 주말 손님도 없으니 흐르는 물소리에 젖어 점심때까지 휨퍼를 읽겠다고. 런던대공습이 있은 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서15년전 썼던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장작은 몇 번의 겨울도 날 수 있을 만큼 사놓았다. 우리의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겨울 난로에 격리돼 있다. 이제 방해받을 가능성은 적다. 차도 없다. 휘발유도 없다. 기차는 일정치 않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름답고 자유로운 가을 섬에 있다. 그러나 나는 단테를 읽겠다. 그리고 영문학 책의 여행에 나설 것이다.                                                                                     1940년 10월 12일의 일기



   [댈러웨이 부인]은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클라리사의 하루에 그녀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다. 그녀의 하루에 내 삶을 겹쳐 놓아 본다. 펜데믹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로워진 건 아니다. 지진과 해일, 대형 사고와 테러가 끊이지 않고 지구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젊었을 때 생각했던, 나른할 만큼 평화롭고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바뀐다거나 번개처럼 계시가 내려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거야말로 계시다.’ 기다리지 않아도 아침은 오게 마련이다. 왜 잠을 이룰 수 없느냐고 따지지 않게 된 후로 새벽이 편안해진 것처럼 그저 여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 전체를 집약할 수 있재능은 클라리사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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