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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30. 2023

처방은 '고통 없이 순한 잠 며칠'입니다

올랜도

     

  하늘이 우렁우렁 울었다. 천둥소리라고 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빗소리를 듣다가 잠시만 누웠다 일어난다는 것이 그만 잠에 빠져 버렸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잠이 깼다. 시계는 3시 40분, 아직 새벽이네 다시 잠에 들다가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래. 이건 낮잠이야. 지금은 오후 3시 40분이라고. 잠을 자버렸네. 할 일을 쌓아둔 채로 말이야. 이상하게 평온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대로 누워서 천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낯선 곳, 낯선 시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뭔가가 달라진 걸 느꼈다. 마치 ‘후지와라 신야‘가 말한 것처럼 ‘어제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공기의 질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마치 내가 있는 곳의 배경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낮잠을 자는 사이에 – 바뀌어 버린 듯했다. 그리하여 ‘고개를 들면 구름의 색도 그 너머 하늘의 깊이도 달라진’ 걸 발견하게 될 듯했다. 그렇다면 나 자신도 바뀌어서 낮잠을 자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일까. 고개를 돌리다가 풋 웃음이 터졌다. 잠들기 전 읽던 책, [올랜도]가 거기 있었다.  


    [올랜도]는 버지니아울프가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에게 공개적으로 보내는 연애편지였다. 이전까지의 버지니아울프 작품들을 사랑하던 독자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런 독자들을 놀리듯이 휙휙 장면이 바뀌는 이야기를 빠른 목소리로 들려주는 데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올랜도]를 계기로 스스로 정형화되는 것을 경계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16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시작한 소설에서 올랜도는 16세의 미소년으로 등장해 300년 정도를 산다. 소설이 끝날 때 올랜도는 36살로 20세기의 여인이 된다. 올랜도는 삶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이를테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거나) 긴 잠-일주일에서 열흘씩-을 잔다. 의사들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올랜도의 잠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는 ‘만약에 그것이 잠이라면 어떤 성격의 잠인가 ‘라고 묻는다.    

  

  치료를 위한 하나의 방편은 아닐까? 인생이 산산조각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죽음의 손가락이 삶의 소용돌이 위에 놓여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매일 소량씩 죽음을 복용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일까?  

                                                                                                  [올랜도] 중에서     

   

  열세 살에 어머니가 죽었을 때 버지니아 울프는 맥박이 너무 빨리 뛰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부를 해서도 안 되고 흥분은 금물이었다. 야외에서의 소박한 삶이 치료의 전부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언니 스텔라의 죽음 사이의 2 년간은 육체적으로 쇠약한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말을 걸면 무서워서 대답을 하는 대신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아버지와 오빠 조지에게 화를 내면서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때부터 책 읽기를 일종의 신경안정제로 삼았다. 이후에도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가족의 죽음 혹은 새 작품의 발표 등) 극심한 심적, 육체적 어려움을 겪었는데 몇 주씩 극도로 쇠약해지거나 불안해하고 기절하는 증세가 되풀이되었다. 심리적 긴장은 두통, 등의 통증, 감기, 고열 같은 육체적 피로를 가져왔고 빠른 맥박, 체중 감소 등의 증세들이 이어졌지만 언제나 회복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자주 아프기는 했지만 병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병을 핑계로 글쓰기를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츰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는 ’ 만약 앞으로 다시 2주간 침대에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전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파서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면 걸작을 쓸 거라고 ‘ 말하기도 했다. [등대로]의 첫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던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질병을 힘과 영감의 언어로 바꾸기에 성공한 그녀에게 병은 무력감이 아니고 선물이며, 소설 쓰기는 치료법 중 하나였다. 버지니아울프의 전기 작가인 허마이오니 리는 ‘이것은 억압이 아닌 영웅적 삶이며, 병의 공포와 고통과 씨름하여 얻어낸 글쓰기의 삶‘이라고 썼다.


   올랜도가 잠에 빠져 보낸 며칠은 바로 쇠약해진 버지니아 울프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인생의 고비마다 육체적, 심적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본인이 아픔을 극복했던 방법 중에서 그녀가 가장 원했던 방법이 아니었을까. ’ 고통 없는 순한 잠 며칠‘이란 처방이라면 그녀가 에세이 <병에 관하여>에서 썼던 것처럼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 다시 보이는 하늘, 대열에서 밀려난 탈락한 이들의 자유’를 들여다보며 숨을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병과 올랜도의 긴 잠은 탁월한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낮잠에서 깬 그대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벌써 얼마인가에 생각이 미친다. 반듯하게 누워서도 책을 잘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몸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고 있는 것만 같다. 다리는 여전히 무겁고 행동은 느려졌다. 외출도 줄고 몸무게도 줄었다. 머릿속에서 매일 성을 쌓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부서져 흩어진다. 그렇다. 건강할 때 의심하지 않았던 질서와 상식의 세계 너머를 배회하는 건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예전의 자신을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된 오후는 기념사진처럼 책장 구석에 남겨두자. 첫 시집을 가슴에 품은 현대의 올랜도처럼 다시 문을 활짝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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