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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5. 2024

아무도 이 편지들을 읽지 못하게 해주세요

버지니아 울프 [출항], [댈러웨이 부인]

   문학회 단체 카톡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곧 조의 문자들이 뒤따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문구가 대부분이다. 보낸 이들은 여럿인데 조의문은 한결같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말을 짓지 못하고 황망함과 슬픔을 열 자 남짓한 짧은 문장 속에 욱여넣기만 한다. 깊이와 강도가 다른 여럿의 감정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줄을 선다. 좀 더 마음을 담을 수 없을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흔들며 나도 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출항]에서 레이철은 그녀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지인들이 보내온 편지에 답장을 쓴다. 레이철은 '그들이 서로 얼마나 많이 다른가'를 떠올리면서 그토록 다른 그들이 그녀의 약혼을 축하하는 글을 쓸 때는 '거의 똑같은 문장을 사용'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팬과 종이를 가져다가 편지를 쓰면서 자신 역시 '그녀 자신이 비난했던 문장들과 상당히 유사점을 지닌 문구'를 쓰고 있다는 점에 놀란다. 편지 쓰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는 레이철의 모습은 마치 보이는 것 너머에 숨어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허허롭다.

    

  레이철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 약혼자와 자신을 포함해서 - 그녀가 쓰고 있는 '종이 사이에 놓인 심연'에 한 번 더 놀란다. 언젠가 세상이 하나가 되어 나누어지지 않는 때가 올 것인가 궁금해한다. 서투르고 볼품없는 문장들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서명을 하는 이 장면을 만약 영화로 만들었다면 레이철 역을 맡은 배우는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 연기를 해야 했을 것이다. 분명 편지를 쓰고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감독은 여러 번 ‘다시’를 외쳤을 테고.   

   

  결국 서투르고 볼품없는 문장으로 '자신들은 매우 행복하고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고 런던에 돌아가면 보러 와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편지 쓰기는 계속 이어진다. 레이철이 쓰는 편지는 여러 장이지만 내용은 엇비슷할 것이다. 받는 사람의 이름만 다른 답장들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는 레이철의 편지 쓰기는 그녀가 맞닥뜨릴 앞으로의 일상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결코 끝나지 않을 그저 그런 날들을 예감한 것일까? 레이철은 잠시 생각한 후에 ‘진심으로’ 대신에 ‘애정을 다하여’ 란 단어를 골라 편지를 마무리짓는다. 다가올 날들을 ‘애정을 다해’ 맞이하겠다는 각오는 레이철 자신과 그녀가 쓴 편지 사이의 심연을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테다. 살아있음의 무게는 진심으로 대한다고 해서 덜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정이 필요할 것이고 레이철은 그걸 알았다.  


   [댈러웨이 부인]에도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다. 레이디 브루턴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녀는 <더 타임스>에 편지를 쓰는 일에 도움을 받고자 휴 휘트브레드와 리처드 댈러웨이를 오찬에 초대하는데 바로 그날 아침 일찍부터 편지를 시작하여 찢고 다시 시작하는 싸움을 하다 끝내 포기한 참이었다. 편지 쓰기가 그녀에게는 남아프리카 원정대를 조직하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었으나 레이디 브루턴은 그들이 사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휴는 레이디 브루턴의 두서없는 계획을 이치에 닿고 문법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표현을 바꾸고 다시 읽어보고 요약하면서 완성한 편지 초안을 읽었을 때 레이디 브루턴은 그녀 자신의 생각이 그처럼 근사하게 들리는 걸 듣고 뿌듯했다. 편지를 써 줄 이들이 있는 한 자신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묻히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으로 레이디 브루턴은 소파에 누워 코를 골기 시작한다.


  요즘에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진심으로’를 쓸지 ‘애정을 담아’를 쓸지 고민하거나 편지 한 장 쓰자고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서 쓰다가 찢고 다시 쓰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시절과 상황에 맞는 인사말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문방구에서 조의금 봉투나 축의금 봉투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축하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시의적절하게 골라서 살 수 있다. 편지지 여러 장을 버려가며 잠 못 이루고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그대로 우체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수거하러 오기까지 기다렸던 기억,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려가며 내가 떨어트린 편지를 찾던 손가락이 지금도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바이올렛 디킨슨에게 ‘내가 당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무도 이 편지들을 읽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라고 썼을 때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글자로 옮기는 일 –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부끄럽거나 후회하지 않을 만큼 - 의 지난함이 내게는 이미 오래전부터였던 셈이다.

    

  말이 많은 세상이다. 올바르게 말해지기도 어렵고 의도한 대로 받아들여지기도 어렵다. 어디에서나 해명, 소명, 사과. 양해라는 단어들이 들린다. 정확하게 말하고 왜곡 없이 도달하는 어려움이 이다지도 크기에 우리는 장례식장 입구에 늘어선 조화의 검은색 리본에 쓰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짧은 문장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만 애도한다. 리본 속에 구겨지듯 들어앉은 마음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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