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Sep 02. 2024

죽음도 삶의 한 방식

디 아워스, 마이클 커닝햄

  영화 [디 아워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한때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 대신 생각했던 제목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세 여자의 하루가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은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그들이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 영화 내내 지켜봐야 한다. 애써 못 본 척했던 사실과 기어이 맞닥뜨려 얼굴은 빨개지고 숨은 차서 헐떡거리고 손바닥에 땀이 찬 자신이 스크린 앞에서 떨고 있다. 예의상 슬그머니 가려주지도 숨을 고르라고 조금씩 풀어내지도 않는다. 내 앞에 그대로 쾅! 내려놓는다.


 로라 브라운의 어느 오후가 있다. 남편의 생일이다. 케이크를 굽다가 실패한다. 망친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다시 만든다. 그리고 외출한다. 길 아래쪽에 사는 래치 부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집을 나왔지만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아들을 보살피도록 해두었고 케이크도 굽고 스테이크용 고기도 꺼내놨고 콩도 다듬었다. 생일 파티 준비는 끝났다. 저녁 준비를 할 시간에 맞춰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지 로라는 혼자 있고 싶다. 아이와 집과 그날 밤의 파티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 휘발유도 가득 채웠고 지갑에는 돈도 있다. 지금부터 두어 시간 동안만 혼자.


   로라는 호텔로 간다. 방을 얻고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다. [댈러웨이 부인]이다. 물론 집에서 나오기 전에도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어보려고 하기는 했다. 차양을 내리고 머리맡의 등을 켜고 책을 읽으려 애쓰면서 침대에 누웠을 때 로라는 미쳐간다는 게 이런 건가 생각한다. 지금까지 미쳐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던 것 - 비명, 울부짖음, 환각 - 과는 다른 방식, 훨씬 더 조용한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건 ‘감각이 무뎌지고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데다 기운마저 없어 슬픔같이 강렬한 감정조차 위안이 될 수 있는 방식‘이다. 그게 집에서 나온 이유다. 로라는 미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로라는 운전을 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런데 그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 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호텔로 간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두 시간 동안 책을 읽기 위해 호텔에서 방을 빌리고 비용을 지불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낭비고 사치라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그동안 제법 검소하게 살림을 꾸려왔고 마침 어느 정도의 돈도 있는 데다가 방값이 의외로 비싸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른다.          

 

  방을 얻는 데 문제는 없었다. 로라는 이제 청록색으로 꾸며진 방의 침대에 누워 있다.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는 게 이렇게 쉽구나 생각한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문득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죽음 역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 죽는 것도 삶의 한 가지 형태라고, 어쩌면 호텔에 투숙하는 일보다 간단할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 걸 기뻐한다. 죽지 않고 살기로 한 것을. 집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머리를 자른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 세상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은 반칙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일종의 도발이고. 사실은 무엇이든 하고 있는 것보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더 어려움에도(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음에 집중해야 한다)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홀로 생각에 잠겨 무리 중 나머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거나 걱정하게 할 것인가? 기어이 누군가가 왜 그래? 끼어든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을 찾아온 언니와 조카들과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장면은 슬프다. 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꾸 이름을 부르고, 조카들은 키득거린다. 보통의 세상에서 혼자의 생각에 빠져있으려면 최소한 어떤 일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안 됐지만 걷기도 마찬가지다. 나가서 조금 걷고 돌아오겠다고 하는 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왜 그러느냐고,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 바로 날아온다. 해야 할 일이 있노라고, 하다 못해 연필을 사 와야 한다는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의심스러운 시선이 골목 끝까지 따라붙을 것이다. 그래서 로라는 머리를 자르고, 댈러웨이 부인은 꽃을 사러 나간다. 버지니아 울프는 연필이 필요하고.


 어떤 이의 행동에 이유를 묻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일까? 영화가 끝나고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

이전 07화 편지에 담을 수 없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