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아버지 생신. 살아 계셨으면 96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로 96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96세가 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렇게 되진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책도 없었을 터,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1926.11.28 일기
바네사가 노예이자 천사인 여자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격분했고, 자신에게 필요했던 자기 연민의 흐름이 가로막히자 자기도 알지 못했던 본능이 끓어올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본능이었다. “네 생각에는 아버지가……”격렬한 분노를 터드린 후에 한 번은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어리석어 보이겠지.”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지.
[지난날의 스케치] 중에서
아버지만큼 관습에 무관심한 사람도 없었다. 그처럼 속물이 아닌 사람도 없었다. 지성을 그토록 존중한 사람도 없었다. (중략) 아버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서히 이마의 주름살을 피며 어떤 결론에 이르고는 내가 들어선 것을 알아차리고 아주 온화한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서가로 걸어가서 책을 꽂고 ‘그 책을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묻곤 했다.
[지난날의 스케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