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어두워지는 겨울 저녁 이 순간에 내 방을 볼 수 있었으면 해. 내가 아끼는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들이 너무도 멋지게 책장에 꽂혀 있고, 멋진 불과 전깃불이 있고, 그리고 수많은 원고와 편지 교정지와 펜과 잉크 더미들이 마룻바닥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온통 널려 있어.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 1904년 12월 중순
버지니아가 고든스퀘어 46번지의 일상에 안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열세 살에 어머니를 잃고 겪은 혼란과 고통스러움이 되풀이되었다. 1904년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세상을 떠나고 3개월 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이탈리아와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심하게 아팠던 버지니아는 그 해 5월에서 8월까지 바이올렛 디킨슨의 집에서 간호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기로 했다(바이올렛 디킨슨은 하이드 파크 게이트에 손님으로 왔다가 자매들이 의지할만한 나이 든 여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꺼이 그 역할을 떠맡은 인물이다. 버지니아보다 열일곱 살 연상인 그녀는 친절하고, 집안 좋고, 키가 큰, 행복한 독신 여성이었다. 바이올렛 디킨슨은 곧 버지니아와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여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정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된다). 버지니아는 바이올렛의 집에 있는 동안 음식을 거부했고, 간호사들을 난폭하게 대했으며, 환상을 보는가 하면 두통에 시달리다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까지 했다. 버지니아는 22 살이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1904년 여름이 지나면서 회복기에 들어선 버지니아 스티븐은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녀의 욕망은 그녀가 더 이상 흥분하는 일 없이 조용하게 살기를 바라는 가족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불러왔다. 버지니아가 느끼기에 자신은 정상이었으나 가족들은 항상 더 기다려야 한다는 식이었는데 이런 상황은 그녀가 병에서 회복될 때마다 되풀이되었다. 버지니아가 런던에 있고 싶어했던 것만큼이나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에서 떨어뜨려 두고 싶어했다. 바이올렛의 집에서 나온 버지니아는 캠브리지에 있는 고모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가 견강을 회복하는 동안 바네사는 이사할 집을 단장하는 틈틈이 버지니아를 안심시키는 편지들을 썼다. 그동안 버지니아 역시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읽고 주석을 다는 작업에 몰두했지만 즐겁진 않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그녀 자신의 글쓰기였다. 버지니아는 이버지 레슬리가 죽은 후 열 달이 지나도록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04년 12월에서야 고든 스퀘어 46번지의 새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그녀의 새 방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남긴 몇몇 원고를 액자에 넣어 벽난로 선반에 놓았다. 책과 타자기, 펜과 종이, 책상을 원하는 곳에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고든 스퀘어의 삶은 그녀가 하이드파크 게이트에서 지냈던 때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바네사는 그림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학교로 갔고 토비는 변호사 자격시험 준비를 했다. 남동생 에이드리언은 캠브리지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버지니아는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읽고 썼고, 치료를 위해서 손을 써서 하는 일을 - 은침필 인쇄기로 책의 표지를 인쇄한다든가 하는 - 하기도 했다. 평생의 취미인 ‘거리 헤매기’도 시작했다. 1905년 정월에 버지니아는 완전히 건강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버지니아는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까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관찰했다. 버지니아는 고든 스퀘어에서도 혼자 있는 걸 좋아했지만 친구들이 찾아오면 어울리려고 노력을 했다. 삶은 절정에 이른 듯했지만 가족 이외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긴장상태였다. 자신이 없었다. 행여라도 조롱과 굴욕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가 선택한 전략은 방에 숨어있는 대신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하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근로자들을 위한 야간대학으로 알려진 몰리 대학에서 강의도 했고 서평도 열심히 썼다. 무보수로 진행한 강의는 2 년간 계속되었다.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계급과 교육에 관한 자신만의 견해들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20년 후 [댈러웨이 부인]에서 셉티머스와 미스 이사벨의 이야기로 재현된다. 버지니아는 잘 알고 있는 과목들을 가르치면서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강의 준비에 공을 들였으나 결국 이 일을 통해 알게 된 건 버지니아 스스로 가르치는 일에 재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버지니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1905년 여름에는 어린 시절 휴가를 갔던 세인트 아이브스를 다시 찾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그중 바이올렛 디킨슨이 동행했던 1906년의 그리스 여행은 슬프고 힘든 기억으로 남았다. 기대에 부풀어 대대적으로 준비했던 여행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왔을 때는 일행 다섯 중 세 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장티푸스에 걸린 바이올렛은 자기 집으로 갔고, 토비와 바네사는 고든 스퀘어의 침실에서 간병인을 필요로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번에는 버지니아가 책임자였다. 버지니아는 바이올렛에게 의지하고 싶었지만 바이올렛 역시 도움이 필요했다. 버지니아는 바이올렛에게 자기가 간병하고 있는 환자들의 상태를 희망적인 어조로 쓴 편지를 연달아 보내고 있었으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토비가 1906년 11월 21일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버지니아는 부고를 써야 했다. 버지니아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일은 바네사가 토비가 죽은 지 이틀 만에 클라이브 벨의 청혼을 받아들인 일이었다.
버지니아가 이 고난의 시기를 건너간 방법은 아프거나 신경쇠약을 일으키는 대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버지니아는 어쩌면 자신의 최초이자 최고의 픽션일지도 모르는 글을 매일 썼다. 몸이 안 좋은 바이올렛에게 오빠 토비의 죽음이나 언니 바네사의 약혼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한 달여의 기간 동안 버지니아는 바이올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복 중인 토비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편지 안에서 토비는 닭고기 수프를 먹기도 하고 간호사들과 장난을 쳤으며 서평을 읽고 병문안을 받기도 했다. 토비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바이올렛에게 토비의 죽음은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는 게 버지니아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바이올렛이 신문에서 토비의 죽음을 언급한 글을 보았을 때에야 버지니아는 거짓말을 그만두었고 바이올렛은 버지니아를 용서했다. 죽음과 약혼, 둘 다 상실감으로 다가왔지만 버지니아는 편지를 쓰는 동시에 픽션을 쓰는 것으로 상실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토비 스티븐, 오른쪽 사진은 버지니아와 에이드리언
버지니아는 바네사의 약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언니를 잃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새 집도 구해야 했다. 엄마 줄리아가 죽었을 때 톨랜드 하우스를 잃고 아버지 레슬리가 죽었을 때 하이드파크 게이트를 잃은 것처럼, 토비가 죽고 바네사가 결혼했을 때는 고든 스퀘어를 잃었다. 신혼부부가 고든 스퀘어를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는 동생 에이드리언과 함께 피츠로이 스퀘어 29번지로 이사했다. 둘은 원래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살기로 했다. 2년 여에 걸친 고든 스퀘어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피츠로이 스퀘어로 이사한 후에도 버지니아는 열심히 글을 쓰고 여행을 다녔다.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기를 모색했고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바네사가 신혼의 행복에 빠져있는 동안 버지니아는 스스로에게 거듭 물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족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작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버지니아는 에이드리언과 함께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클라이브를 형부로서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독신 여성이자 이모이며 작가로서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색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