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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05. 2024

청혼

클라이브 벨과 리튼 스트래치

   만약 내가 리튼과 결혼했다면 나는 절대로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 호기심 어린 방법으로 제지하고 금한다(1929. 12. 14 일기)     


    언니 바네사가 결혼하자 버지니아에게도 결혼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그녀는 결혼 적령기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1902년에 베레스포드가 찍은 스무 살의 버지니아는 연약해 보이지만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미래의 구혼자들은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정신병력과 특이한 가족, 그리고 학식에서 먼저 압도되었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평범한 구혼자도 그녀의 곁에 쉽게 다가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청혼은 여러 차례 받았다, 블룸즈버리의 친구들 중 버지니아와 제일 가까웠던 남자들은 클라이브 벨과 리튼 스트래치였지만 그 둘은 애초에 남편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버지니아가 이들과 가까웠던 것도 그들이 명백하게 남편감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클라이브 벨은 형부였고 리튼 스트래치는 블룸즈버리 친구들 중 가장 현란한 동성애자였다.     


    1908년 2월에 바네사가 줄리언을 낳았을 때 버지니아는 형부 클라이브와 가까워졌다. '스스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자기중심적 ‘ 이었던 클라이브는 섬세하고 문학적인 사람이었다. 사교적이고 재치있는 탐미주의자이기도 했다. 버지니아는 클라이브에게 글쓰기에 대한 끌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버지니아는 그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다투기도 했지만 대체로 가깝게 지냈다. 버지니아는 클라이브의 솔직함과 유머, 그리고 문학적인 면모를 좋아했다. 자신이 쓴 글을 그에게 기꺼이 보여주었다. 버지니아에게는 클라이브가 그녀의 글을 읽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일은 토비가 살아있었다면 해주었을 만한 일이었고, 나중에는 레너드가 할 일이었다. 클라이브는 비판적인 남성 독자가 되어줌으로써 버지니아로 하여금 지적인 남자와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1908년 5월부터 두 사람이 시작한 가벼운 연애는 위험한 게임이었지만 차츰 우정으로 바뀌었다. 버지니아가 클라이브의 소유욕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는 버지니아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자신만의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     


    바네사는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입을 다물었다. 바네사는 자신이 느낀 질투심을 무시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바네사는 버지니아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모른척할 수 없었다. 하이드파크 게이트 시절의 기억, 세인트 아이브스 섬의 모래사장에서 보낸 날들, 함께 아버지에 맞섰던 일, 가족의 죽음 등 그들이 공유했던 시간들이 바네사가 버지니아에게 쏟는 애정이 손상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던 건 아닐까? 동생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네사는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     


“당신이 그녀를 북돋아줘서 나는 차라리 미안해요. 염소(버지니아의 별명)는 어쩌면 그토록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지……“     


 버지니아에게도 말했다. 

    

“내 남편이 보낸 편지들을 내가 볼 수 있도록 간직하는 것을 잊지 마. 아니, 너무 사적인 편지들이니?”  

   

    바네사는 동생에게 클라이브와의 서신왕래가 자신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농담을 하곤 했다. 동시에 자신을 얼마나 열등하게 느끼게 하는지도. 그러나 이런 삼각관계가 자매를 멀어지게 하진 않았다. 물론 서로에 대한 감정이 미묘하게 바뀐 건 사실이었다. 서로애 대한 믿음은 조금 약해졌지만 그만큼 더 솔직해졌다. 바네사가 없는 버지니아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평생 같은 편이었다.   

  

    버지니아는 어렸을 때부터 리튼 스트래치와 그 가족을 알았다. 리튼은 유명한 정치가의 아들로 버지니아보다 두 살이 많은 인기 작가였다. 버지니아는 1903년에 처음으로 리튼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은 리튼 스트레치가 계속해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던 곳이자 그것에 관해 쓰느라 평생을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가족에 대한 리튼의 고통스러운 헌신은 버지니아의 그것과 닮았다. 그들은 토비가 죽은 후에 한층 가까워졌다.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리튼 스트래치는 거만하고 까다로운 데다가 엄한 면이 있었고 그런 점이 그녀를 성가시게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버지니아는 리튼 스트래치와 함께 몇 시간이고 걷고 이야기할 수 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눈 애정 어린 대화에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박수 쳐 달라는 갈망이 섞여있었다.     


    버지니아는 [출항]에서 리튼을 ‘세인트 존 허스트’라는 허구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고통스럽고 불행한 인물이었던 허스트의 자만심, 병약함, 인정 욕구 같은 것들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밤과 낮]에서는 캐서린의 약혼자였던 로드니에게 리튼의 약점들을 – 허영심, 권위의식, 숨겨진 열등감 등을 - 다시 한번 부여했다. 훗날 [애틀랜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버지니아는 이제는 고인이 된 리튼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할 만큼 객관적으로 해부하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리튼은 버지니아의 최측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주기가 용납된 건 아니었던 것이다. 둘은 명예를 향한 경주에서 함께 뛰었다. 리튼은 토끼였고 버지니아는 거북이였다, 버지니아가 리튼을 질투했던 건 사실이다. 버지니아는 그가 읽는 것을 읽고, 그의 의견을 염두에 두고 에세이를 썼다. 그렇지만 지금 사람들은 리튼 스트래치가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    

 

    리튼이 버지니아에게 청혼을 한 건 1909년 2월 17일이었다. 그전에 리튼은 레너드 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어느 날 버지니아와 결혼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쓰기도 했다. 바네사 역시 남편에게 버지니아가 2년 안에 리튼과 결혼할 거라고, 어쩌면 벌써 약혼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둘이 결혼을 할 거라는 예측은 누구나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튼이 버지니아에게 청혼하는 장면은 희비극이었다. 청혼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리튼은 ‘그녀가 나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죽음이다’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오해에 소름이 끼쳤다. 버지니아가 자신과 사랑에 빠졌을까 봐 겁이 났다. 버지니아 역시 충동적으로 승낙을 했지만 다음날 그들은 서로 해명을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리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둘은 평생 다정한 친구로 남았다.   

   

     청혼 소동이 있던 당시에 버지니아는 일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리튼이 쓴 편지를 통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그 편지의 수신인은 나중에 버지니아와 결혼하게 될 레너드 울프였다. 레너드는 당시에 실론에 있었다. 리튼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버지니아의 얘기를 하고 레너드는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버지니아를 향한 마음을 키웠지만 그들이 결혼하기까지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19년 11월 15일에 버지니아는 일기에 썼다. 리튼이 청혼한 지 10 년이 지난 후였다.  

   

“만약 내가 그와 결혼했다면 나는 그가 성을 잘 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너무 많이 구속했을 것이고 만약 벗어나면 불평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때, 그러니까 클라리사가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걸어가는 장면을 쓸 때 자신의 이 문장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던’ 피터와의 관계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므로', 결국 ‘결혼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 또 그래야 했다고’ – 다시 한번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무엇이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수돗물처럼 사라지는 걸 싫어했던 버지니아였으니 이 이야기 역시 댈러웨이 부인 속에 슬쩍 끼워넣었으리라.    

  

    몇 년후인 1923년 1월 2일에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를 쓰면서 과거의 자신을 다시 한번 불러냈다.


“수년 전 리튼과의 사건 후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네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가질 가치가 없다고 결코 속이지 마라. (중략) 예를 들어 아이들이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있다고 결코 속이지 마라.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로 좋아해야만 한다. 아니면 차라리 그것들이 우리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게 제거해야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버지니아의 슬로건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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