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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10. 2023

집안의 천사, 모두의 어머니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

   버지니아 울프는 첫 장편소설에서 11살에 어머니를 잃은 레이철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24살인 레이철은 댈러웨이 부인이 어머니에 대해 물었을 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만 떨고’ 있다. [등대로]의 릴리 브리스코 역시 램지 부인(어머니를 형상화한 인물)의 초상화를 좀처럼 완성시키지 못한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릴리가 초상화를 완성하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은 버지니아 울프가 어머니에 관한 감정을 글로 풀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대변한다. 레이철과 릴리가 겪는 어려움은 바로 버지니아의 어려움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회고록 [지난날의 스케치]를 쓰기 시작한 건 1939년 4월이었다. 로저 프라이의 전기를 쓰는 일이 순조롭지 않던 차에 바네사의 종용에 못 이겨 쓰기 시작한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처음으로 떠올린 기억은 어머니의 드레스였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꽃과 자주색 꽃무늬가 있던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어딘가로 가고 있던 최초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회고록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어머니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 희한할 정도로 어렵다고 고백했다. 열세 살에 어머니를 잃은 후부터 마흔넷이 될 때까지 어머니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등대로]를 쓰고 나서 그 감정이 사라져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고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던 그가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후에 다시 어머니를 쓰는 일의 어려움에 맞닥뜨렸던 건 왜일까?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고 어려웠으며 뒤섞여 있었다. 레이철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거나 릴리 브리스코가 초상화를 그리는데 애를 먹는 모습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조차 자신과 단둘이 있었던 기억이 없었다는 버지니아 울프는 ”언제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라고 썼다. [지난날의 스케치]에서 ‘어른의 시각’으로 어머니를 묘사한 글에서는 한 순간도 어머니를 독점하지 못하는 아이의 갈망과 허전함이 느껴진다.


일곱 자식을 둔 마흔 살 여자가 보인다. 몇 명은 성장한 자식으로서 관심을 요했고, 네 명은 아직 놀이방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여덟 번째 자식 로라는 백치로 아직 함께 살고 있었다. 열다섯 살 연상인 남편은 완고하고 까다로운 인물로 아내에게 의존했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통제해야 했던 여자는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에게 고유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음을 나는 이제 이해한다. 어머니와 단둘이 몇 분 넘게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어머니 줄리아는 ‘내 어머니’ 였다기보다는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존재’였다. ‘아주 넓은 표면에’ 얇게 퍼져 있었으므로 누구에게든 집중적인 관심을 쏟을 시간과 힘은 부족했다. 그럼에도 ‘전체’였다. 집 전체가 어머니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시절 버지니아 울프 세계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1895년 5월 5일, 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족의 생활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썼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시 버지니아 울프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줄리아 스티븐은 단호하고 보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다. 일기나 자서전은 남기지 않았고, 편지는 많이 썼지만 남아 있는 건 많지 않다.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고 여자들은 집안일을 위해서만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줄리아에게 갖는 낭만적인 이미지는 19 세기의 여인에게 용인된 역할을 구체화시킨 것, 곧‘집안의 천사’다.


   ‘집안의 천사’는 코번트리 패트모어의 시 [집안의 천사 The Angel in the Home](1854)에서 따온 것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을 가리킨다. 가정 안에 머무르며 남편과 가족을 위해 순종하고 봉사하고 희생했던 가부장 사회의 여성상을 순결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미화한 이미지다. 울프가 [여성의 직업]이란 에세이에서 언급한 ‘집안의 천사’는 일상의 어려움을 도맡아 해결하고 매일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소망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는 순결한 여자였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집안의 천사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은 버려두고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열심인 걸 보고 자기들도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집안 신문인 <하이드파크게이트 뉴스>에 쓰기도 했다(하이드파크게이트 뉴스는 아이들이 만드는 신문이었다. 주로 버지니아와 토비가 글을 쓰고 바네사는 그림을 그렸다. 완성한 신문을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코멘트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훗날 버지니아울프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신문사나 독자, 비평가들의 반응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 잘 겹쳐지는가). 끝없는 집안일과 자원봉사와 손님 접대로 하루가 짧았던 어머니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어느 가정에나 있었다. 어른이 된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정교하게 되살려낸다.


   램지 부부는 여름마다 스코틀랜드의 스카이 섬으로 휴가를 간다. 아이들과 손님들로 집안은 항상 북적인다. 램지 부인은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남편의 기를 살려주느라 바쁘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보내고 주기적으로 마을의 가난한 이들을 방문한다.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으려 애쓰는 탓에 정작 그녀에게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해서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없어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기뻐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소소한 일상사를 숨기면서 아이들이 그걸 눈치챌까 불안해서 작은 거짓말을 하거나 남편의 새 책이 별로라는 걸 본인이 알아차릴까 겁을 내기도 한다. 그런 일들이 램지 부인에게서 생기를 빼앗고 기쁨을 앗아간다. 램지 부인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죽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부인의 죽음을 괄호 안에 넣는다. 맥락도 설명도 없이.


(램지 씨는 어느 새벽 미명에 복도에서 비틀거리며 팔을 뻗쳤지만, 램지 부인은 간밤에 갑자기 죽었으므로, 뻗은 팔은 그저 비어 있었다.)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는 ‘지난날의 스케치’에서 어머니가 진이 빠져(worn out) 돌아가셨다고 썼다. 어머니를 잃은 후 집안은 슬픔에 빠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지만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다음 번 ‘집안의 천사‘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집안의, 보통명사로서의 어머니는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버지니아가 어머니에 대해 쓰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혹시 이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어머니’라는 단어가 가진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 나만 알고 있는 고유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가정말이다. 너무 많은 요구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어머니,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존재가 되느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일은 힘들었을 어머니, 요구와 기대 뒤에 숨어있던 어머니의 본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열세 살의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만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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