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Feb 02. 2024

무인 카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오마주 프로젝트

   가스계량기가 고장 나서 신고를 했더니 계량기를 교체해야 한단다. 시간약속을 한 수리기사가 오지는 않고 전화를 했다. 근처까지 왔는데 집을 못 찾아서 주변을 계속 돌고 있다고 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는데도 별무소용이니 길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어디쯤이냐고 물어봤다. 다리 건너 편의점 지나서  ㅇㅇ교회 옆 카페 근처라고 했다.      


“카페요?”     


  우리 동네에 카페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는데 대답이 늦어져 답답한 지 ㅇㅇ교회옆에 있는 분홍색 무인카페라고 다시 한번 말해준다. 아, 거기! 그 카페를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언덕길로 올라오세요. 오른쪽에 빌라를 끼고 작은 동산 쪽으로 계속 올라오면 또 다른 빌라가 보일 거라고, 그 빌라 정문 맞은편 골목 안쪽으로 오라고 얘기해 줬다. 통화가 끝난 후 바로 밖으로 나갔다. 골목 끝에서부터 자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남자 둘이 가스계량기를 교체하고 돌아갔다.  

    

   이사 온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집을 찾아오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아무래도 큰길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고 올해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이 잦으면 자동차들이 경사가 급한 언덕길을 올라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우체국 아저씨가 눈 때문에 다음 날 들르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그러고 보면 동네 어귀에 상가가 들어서고 미용실과 식당, 편의점 그리고 빌라가 몇 채나 들어서긴 했어도 그리 변화가 많았던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주택들은 변화가 없고 이사도 드물다. 동네 어귀에 장승처럼 커다란 나무가 서 있고 감나무가 둘러싼 밭에서는 봄이면 동네 주민들 여럿이 모종을 심고 줄을 묶는다. 산수유 울타리가 있는 빌라며 모퉁이 대추나무집, 언덕길 초입의 목련도 그대로다.  

    

   지난가을 삼거리 대추나무집 옆 유리 가게 앞에 합판과 페인트가 놓인 걸 처음 보고는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호기심에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게 바로 카페였다. 건물을 새로 짓는 건 아니고 페인트로 칠을 하고 테이블 몇 개와 의자를 들여놓은 게 전부였으나 흰색의 마감이 산뜻했고 가게 앞의 입간판은 분홍색으로 눈길을 끌었다. 가게 전면은 전부 유리문이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나다가 누가 있기라도 하면 나는 내가 그 카페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반색을 했다. 그래 추울 때 몸을 녹이기에 좋겠네, 더울 때는 잠시 쉬면서 목을 축이기에도 그만이겠지. 종일 집에서 종종거리다가 도망가고 싶으면,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조금 더 밖에 있고 싶으면 잠시 숨어들어도 좋겠다. 박완서 역시 어느 낯선 거리에서 춥고 지친 채로 ‘손바닥에 차고 매끄럽고 예쁜 키가 쥐어지는’ 공상에 빠진다. 


저 호텔 중 아무 호텔이라도 좋으니 아무튼 호텔 방 하나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겨울엔 난방이 되어 있고 여름엔 냉방이 돼 있고, 언제나 나만의 것이고 그게 내게 주어진 데 아무런 조건이 없다. 나는 아주 가끔만 그곳에 갈 것이다. 정말로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이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을 때만 그곳에 갈 것이다. 이 도시에서 완전히 내가 혼자일 수 있는 나만의 방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박완서, <겨울산책> 중에서

 

   신나는 일이고 말고! 

  

   남편이 은퇴하고 나니 혼자 있을 시간이 없다. 이른 아침 남편과 아이가 탄 차가 골목길을 돌아나가고 나면 그때부터 온전히 혼자가 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히 혼자가 되어야만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밥 짓고 빨래하고 읽고 쓴다. 며칠에 한 번 정도는 시장에 다녀오는 게 전부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 종일 함께 있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홀로 있던 그때가 일은 더 많아서 실제로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다만 혼자였다는 것,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면서도 집 안팎에 여백이 많아 숨쉬기가 편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내 방에서 홀로 지내면서도 답답할 때가 많다.  박완서 역시 그럴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난방이 잘된 집에서 배불리 먹고 편안히 빈둥댔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고, 집에 붙어 있음으로 생기는 온갖 인간관계까지가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표표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박완서, <언덕방은 내 방> 중에서 


  나는  ‘차고 매끄럽고 예쁜 키’도 없고 표표히 찾아갈 수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의 언덕방’도 없지만 분홍색 간판을 단 카페가 있는 동네에 산다. 괜히 혼자 있고 싶을 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슬며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이면 변변한 가로등도 없어 어두운 동네에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 생긴 것이다. 그 작은 가게가 오래 번창하기를 바란다.        

                         



*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매거진의 이전글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