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당이 <자기만의 방>이기도

버지니아울프가 부러워

by 라문숙

열대야가 27일째라고 한다. 전국 대부분에 폭염경보가 내려졌다고도 한다. 체감온도가 35도가 넘으니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그늘에서 휴식을 하라는 문자가 매일 온다. 그렇더라도 오후마다 마당에 나가는 걸 거를 수는 없다. 시간은 오후 4시 근방이다. 마당은 반 정도가 그늘이고 나머지 반은 따가운 햇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거기가 내 자리다. 그늘이 아니고 해가 드는 곳이 좋다. 나는 머리와 어깨와 팔과 발등을 그대로 햇살 아래 꺼내 놓는다. 그러면 허기가 좀 가신다. 허기라고? 그래, 허기. 몹시 굶어서 배고픈 느낌.


"내 맘대로, 홀로, 말없이, 질문도 없이, 머리를 비운 채로, 그대로 있기"를 하지 못하여 생긴 허기다. 그러니 이 염천에, 모든 이가 꺼리는 열기 속으로 혼자 나가 잠시라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과 아랫동네를 번갈아 둘러보다가 심심해지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잔디를 훑는다. 잔디 사이사이에 박혀있는 주름잎이나 바랭이를 뽑는다. 그럴 때 마당은 나가는 곳이 아니라 들어가는 곳이 된다. 트여 있지만 닫혀 있기도 하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지만 홀로 있다. 집안의 어느 곳보다 깊고 고요한 곳, 마치 '자기만의 방'처럼.


회색 플라스틱 장바구니가 반 넘어 차면 허기가 좀 가신다. 가슴도 든든해지고 머릿속을 지나는 바람소리도 가라앉는다. 시들어가는 채송화, 말라비틀어진 양귀비 꽃대, 맹해 보이는 자라공의 이파리, 새 순을 올리는 범부채들이 마구잡이로 섞인 내 풀바구니를 옆에 놓고 그대로 올려다보는 하늘, 눈이 시리다. 버지니아 울프는 로드멜에서의 한 때를 글로 남겼다.


"붉은 장미 냄새를 맡으며 잔디밭을 가로질러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글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어제 마지막으로 쓴 문장에 나 자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을 것이다. 마치 잠수부처럼."


몽크스 하우스에 마련한 글 쓰는 오두막으로 향하는 순간의 묘사일 것이다. 때로는 곧장 가지 못하고 중간쯤 어디에 그대로 누워버리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울프에게도 정원은 역시 <자기만의 방>이었으리라. 영감을 얻고 그것을 키우는 장소였을 몽크스 하우스의 정원에서 울프가 가꾼 것들 중에는 아마 상상력과 창의력도 섞여 있었을 터, 울프가 정원에서 드러눕지 않았다면 단편소설 <과수원에서>의 도입부와 같은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미란다는 사과나무 밑 긴 의자에 누워 잤다. 읽고 있던 책이 풀밭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직도 한 문장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계집아이들이 이렇게 깔깔대고 잘 웃는 나라는 아마 드물 것이다." 아마 이 대목을 읽다가 잠든 것 같았다. 사과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손가락에 낀 오팔 반지가 초록색이 되었다가 장밋빛이 되었다가 오렌지빛이 되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자줏빛 드레스가 줄기에 붙은 꽃처럼 살랑거렸다. 풀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나비가 그녀의 얼굴 위로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단편, <과수원에서>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어룽거리는 태양빛과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에게 단어와 문장들을 받았다. 내가 받은 건 기미와 주근깨, 얼룩 뿐이라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나를 찾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