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숲에서 온 위로

감자수프와 마가목차, 배추된장국

by 라문숙


작년보다 일주일을 앞서서 강원도 홍천의 은행나무 숲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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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의 논은 벼가 익어 황금빛이거나 추수를 마친 갈색빛이었다.

수확이 한참인 무밭을 지나고 흐드러진 코스모스들을 지났다.

평일이라 오고 가는 동안 도로는 한산했으나 가을볕은 소란했다.







은행나무 숲은 여전했으나 올해 유난히 가물었던 탓인지 잎 가장자리가 타들어간 모습이 군데군데 보여 안타까웠다. 비가 안 와서 큰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지난 여름이 남긴 흔적은 가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랗게 물든 숲은 동그란 은행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안쓰럽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어려웠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어도 숲은 아름답다. 사람도 그러면 오죽이나 좋을까.



몸도 마음도 노랗게 물이 들 정도로 숲을 헤매고 다닌 후에 돌아나오는데 낯선 꽃이 피어있길래 다가가 보니 개나리다. 개나리가 가을에 핀 모습도 신기한데 초록 이파리까지 무성하다. 개나리는 이른 봄에 잎도 없는 메마른 가지에서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인데 시기도 모양도 본성을 거스르니 이렇듯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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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숲으로 드는 길목에는 개천이 흐른다. 다리 앞에 장이 섰다. 배추와 무, 감자와 고구마, 단호박 같은 채소를 판다. 감자전을 부쳐주는 천막에서는 막걸리도 마실 수 있다. 씨가 없는 포도를 맛있다고 두 상자 사들고 나오다가 뒤늦게 놀라고 만다. 씨가 없는 포도라니! 하긴 씨 없는 수박도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어쩐지 나는 에쿠니 가오리가 '발 모양 양말'이라는 단어에 놀라 멈춰 섰던 것처럼 가을에 핀 개나리와 씨 없는 포도에 놀라 멈춰 서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아쉽다.

은행나무 숲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식당이 하나 있다. 이렇게 깊은 숲에서 식당을 열고 산나물과 된장찌개를 파는 이가 있었다. 소박한 점심 한 끼에 감동해서 식당 마당에서 파는 감자를 한 상자 샀다. 곱게 마른 마가목도, 인근의 농부가 기른 것이라는 배추와 무도 샀다. 그녀가 몇 년 동안 묵힌 것이라는 된장도 한 단지, 봄에 산을 기어올라 거두어 말린 곤드레 나물과

단맛이 없어 개운한 뚱딴지 장아찌와 곰취장아찌도 한 통씩 챙기고 복 받으시라는 인사는 덤으로 받았다. 밥 먹고 나물 구경하는 동안 산속에 있는 평일의 식당이 어쩐지 부산하구나 했더니 모방송사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취재 중이라고 했다. 식당 이름은 '오대산 내 고향'이다.



강원도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지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달리게 된다. 눈이 부셔 피곤해할 때마다 선글라스가 생각난다. 나는 그동안 선글라스가 없었다. 이삼 년 전에 동생의 선글라스를 한 번 껴 봤더니 눈이 시원하고 맑았다. 갑자기 선글라스가 갖고 싶어서 하나를 장만했다. 원통형의 하드케이스에 담긴 선글라스를 샀으되 그걸 어쩌지 못해 서랍장에 넣어두고는 나올 때마다 챙기지를 못해 제대로 써 본 기억이 없다. 나는 선글라스는 있어도 선글라스를 낀 멋진 여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군! 차이라면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보고서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말해놓고 보니 그게 그건게 아니라 엄청난 차이다. 역시 선글라스는 하나 있어야겠구나.



은행나무 숲에서 사가지고 온 감자로 수프를 끓였다.


양파를 가늘게 썰어서 버터에 볶았다. 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부드러운 갈색이 돌 때까지 볶는다. 오래 볶을수록 풍미가 좋아지므로 귀찮더라도 거르지 않는 과정이다. 양파가 충분히 볶아지면 나박 나박 썬 감자를 물에 헹구어 전분기를 거둔 다음 함께 볶는다. 감자에 기름기가 충분히 돌면 물과 우유, 생크림을 붓고 뭉근한 불에서 끓인다.

감자가 끓고 있는 동안 치즈를 갈았다. 보통은 감자와 양파만으로 끓이지만 아이의 중간고사 기간이라 인심 좀 썼다. 고마우신 분께 선물로 그레이터를 받은 후에 치즈 인심이 후해진 것 같다. 수월하고 재미있는 데다가 눈처럼 떨어지는 치즈가 얼마나 예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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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와 양파가 부드럽게 물러지면 블랜더로 간다.

갈아놓은 치즈를 넣고 잘 저어서 소금과 후추를 갈아 넣고 간을 맞추면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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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의 배합은 타샤 할머니의 레시피를 따르되 방법은 현대적이고 간단하게 한다.

강원도에서 온 감자수프와 씨 없는 포도로 차린 어느 날의 아침.



마가목이라는 식물을 안 건 오래되었다.

중학교 때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를 처음 읽고 나서였다. 끝도 없이 내리는 러시아의 눈을 배경으로 혁명에 몸을 바친 남자들과 그 남자들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이야기보다 마가목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마가목의 열매가 얼마나 붉으면

핏방울이 마가목 열매처럼 보일까 하는 생각을 그 책을 읽을 때마다 했다. 지바고를 읽는 것은 일 년에도 여러 번이었는데 아마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그랬던 것 같다. 우스운 건 너무 여러 번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을 새 책으로 바꾸고 나서 되풀이 읽기가 멈춰졌다는 건데 그건 '그리스인 조르바'나 '토지'도 같다. 참으로 이상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 그 마가목을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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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주전자에 마가목 붉은 열매를 넉넉하게 넣고 삼십 분쯤 끓였다. 처음에는 메마른 나뭇잎의 냄새가 났다. 가을 숲의 냄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매의 색이 점점 옅어지더니 은근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주방 근처가 달큰해진다. 행복한 숲의 향기를 가져왔구나 싶어서 즐거웠던 마가목 열매 달이기.


껍질 벗긴 밤이 냉장고에서 며칠 지났길래 약식을 만들었다.

올해의 첫 번째 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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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목 달인 물을 차처럼 약식에 곁들었다.

기름기가 배인 약식을 먹고 난 후 마가목 차를 마시면 입안이 깔끔해진다.

차는 넘어가도 향기가 남으니 더욱 좋았던 어느 날의 티타임.


그리고 배추가 있었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김치냉장고 야채칸에 넣어두었던 걸 꺼내어서 국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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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의 노란 속대를 넉넉하게 잘라서 된장을 푼 육수에 넣고 뭉근한 불에서 오래오래 끓였다.붉게 익은 청양고추 하나를 따서 쫑쫑 썰어 넣고 집간장으로 간을 했더니 저녁을 달게 먹는다. 힘이 들어 어쩔 줄 모르겠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같이 힘이 든다.

힘든 일을 대신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지 마라 할 수도 없으니 나는 그저 주방으로 갈 뿐이다. 달콤한 약식에 계피향을 듬뿍 입히거나 구수하고 들큼한 배춧국을 끓이거나 얼음을 넣은 꿀물을 만든다. 식탁 위에 놓인 국 한 대접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 잘 알기에 그렇다.



가을도 익는다.

이제는 메리골드도 절정을 지났고 화분들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

나뭇가지들은 갈수록 성글어지고 볕은 점점 노랗게 물든다.

어느새 금요일.

시월도 절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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