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작가의 글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중반부까지는 흑백 영화를 보듯 장면들이 묘사되었고, 후반부에는 조금 빠른 호흡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는 않지만 치밀한 구성력과 내용 전개로 6.25전후 세대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소설의 큰 줄기는 비극의 땅 장흥군 유치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영육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아버지가 남로당원 이었던 한 남자의 삶을 형상화 시킨 것입니다. 어린 시절 태생적 한계로 인해 주눅이 든 채 잉여 인간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김오현)의 한스러운 일대기를 아들(칠남)과 대화 형식으로 담백하게 풀어내었습니다.
소설배경이 된 지역은 한국전쟁 이후 북으로 가지 못한 남로당원들이 유치면 일대의 산골자기를 접수하고 토벌하려는 경찰대와 일진일퇴의 투쟁을 벌였던 지역으로 소설 태백산맥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그 유치지역이 2006년에 수몰되어 장흥댐이 되었는데 수몰 당시 파산하여 가족이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슬픈 현실, 힘든 타향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삶, 고향에 거주하지 않아 조상의 무덤을 관리하지 못하게 된 애환들도 그려집니다.
이 책을 읽고 ‘6.25와 민족분단’, ‘恨과 승화’, ‘전통과 유교문화’, ‘무속신앙’, ‘장자편애와 유전’, ‘연좌제와 운명’, ‘허례의식과 체면’, ‘빨치산과 숙청’, ‘좌익과 우익’, ‘증오와 복수’, ‘저주와 대물림’, ‘욕망과 생명력’, ‘자존과 사랑’, ‘결핍과 대리만족’, ‘비굴과 복종’,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와 자식’, ‘선택과 책임’, ‘희생과 헌신’, ‘문학과 예술’ 등 많은 의미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전쟁 전후에 장흥군 유치면 일대에서 할아버지의 좌익활동(빨치산)으로 인해 입은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 김오현의 정신적인 외상과 가슴속에 한이 소설의 모티브로 작용하여 소설분위기는 묵직하지만 작가의 구수한 입담으로 술술 풀어냅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태어난 고향 장흥 인근이 배경인데도 빨치산에 대한 이해가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후 시대 상황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질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증조할아버지께서 6.25당시의 상황을 전해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가족들도 몰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선조들의 기막힌 역경들을 이겨낸 기적들의 결과들이 연결되어 태어났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선조들과 부모님의 삶에 대한 이해의 경계가 확장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세련되지 않고 투박한 표현 방식이었지만 정이 있고 된장 뚝배기 같은 진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정성을 쏟을 여건이 되지 않을 정도의 힘든 경제 상황과 많은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시골 환경에서 자란 저는 많은 결핍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살았습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서 저는 오히려 좋은 여건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마철의 곰팡이를 이기는 것은 가뭄이고, 가뭄을 이기는 것은 번개와 우레고, 번개와 우레를 이기는 것은 햇볕이고, 그 햇볕을 이기는 것은 꽃그늘이고, 꽃그늘을 이기는 것은 밤이고, 밤을 이기는 것은 잠이고, 잠을 이기는 것은 아침이고, 아침을 이기는 것은 지심이고, 천심이라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누가 쉽게 평가하거나 제단 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라도 그 사람만의 이유와 아픔이 있을 것이라는데 까지 이르게 된 점은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만약 임권택 감독이 메카폰을 잡고 ‘물에 잠긴 아버지’를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남도의 아름다움과 민족의 한의 정서를 잘 풀어내어 후손들과 연결될 수 있는 정서를 전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처형되는 사진, 오래된 가족사진, 수몰된 장흥댐, 그리고 큰 아들 대상 작품 정도를 넣어 회오리 모양으로 만들었을 영화 포스터도 떠오릅니다.
고향 길을 가끔 지나면서도 장흥댐 수몰민들의 애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역사와 한과 조상의 뿌리들이 퇴적하고 잠긴 곳입니다. 앞으로는 지날 때마다 잠시 장흥댐을 바라보며 소설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그곳을 바라 볼 것입니다.
소설은 각 장마다 핵심단어로 압축하면서도 작가가 말하고픈 이야기로 수렴합니다. 그는 전통을 사랑하고 서민의 아픔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희망을 전하는 큰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우리나라의 아픈 민족사는 그에게서 지금도 예술이 되어 빚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80세가 훌쩍 넘은 작가님께서 건강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