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후 고등학교는 타지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용돈을 타러 시골에 갔습니다.고등학교 때부터 방황이 심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놀고 꾸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용돈을 받은 즉시 시내로 가서 옷을 구입했습니다. 유행하는 비싼 옷(게스, 아라, 캘빈클라인, 인터크루, 블랙 엔 화이트)을 한벌 구입하면 용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궁색해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메이커 병에 걸려 옷으로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셨어도 돈을 달라면 조금 더 주셨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올라오셔서옷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어머니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조르자 어쩔 수 없이 사주셨습니다. 몇 년 후에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아들이 철이 들까" 형편이 어렵다는 말씀은 차마 그때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어려운 여건임에도 돈 걱정하지 말라며 이웃에게 빌려서 송금하셨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겠지" 라며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후 부모님께 반항하며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여 자주 짜증을 내며 어머니께 함부로 했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부모님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식 잘되는 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요. 당신께서는 새벽마다 무릎 꿇으며 오매불망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시집 온 이후로 시골에서 직장 생활에, 농사일에, 조부모 봉양과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어머니인생은 없었습니다. 아등바등 사시며 자식들을 위해 애쓰셨음에도 어머니의 지난한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어머니도 견디려고 애쓰셨을 텐데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아련합니다. 많이 우셨고, 쉬지 못하셨고, 당신이 아플 때마다 노심초사 오히려 자식들을 걱정했습니다.
자식을 키우니, 사춘기를 겪게 되니 비로소 어머니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십니다.지금은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머니가 살기 위한 통곡이자 자식을 위한 애씀이었습니다. 그리움의 외침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이름이 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