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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 정문선 May 07. 2020

[일상 관찰] '오늘'의 추억

사랑으로 채워지는 행복

시골 부모님께 아침 전화를 드렸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건강을 챙기라는 안부였다. 엊그제 모처럼 일손을 덜어 드린 게 흡족하신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장문의 문자에는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당신의 서운함이 들어있었다. 발단은 이렇다. 고추 모종 비닐을 흙으로 고정하면서 문득 말을 꺼냈다. "엊그제 야구를 하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많이 부럽데요. 그런 기억이 저는 거의 없어서요"


  겸연스러워하시면서 "시골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다른 곳에 사셨다. 딸린 동생들도 많았고 조부모 밑에서 많은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너희들에게 소홀한 부분도 있었다. 지금 너희들은 아이들에게 참 잘하고 사는 것 같다"라며 담담하게 전하셨다.


  꾹꾹 참아왔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씩 푸셨다. 7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 듯했다. 힘들었던 기억들을 묻어둔 채로 사셨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잔상들과의 괴리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장손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장으로서 일찍부터 고단한 삶을 사셨구나"라는 애잔함에 뭉클했다.


  그러나 실제 가장으로서 모진 풍파를 견디신 어머니 생각에 '아버지 미움'이라는 묵은 감정이 몽글몽글 되살아났다.

아버지와는 여전히 낯설고 대하기 어렵다. 내가 쏟아냈던 말들에 신경 쓰였는지  문자 말미에는 "이제는 좋은 부분을 더 기억해 달라"라는 당부도 있었다. 그렇게 군림하셨던 거친 산이 세월 바람에 풍화되어 많이도 깎였나 보다. 이제는 완만한 구릉 같다는 생각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며 어제 미역국을 끓여 놓으셨다. 십 수년 동안 아이들 보살핌부터 살뜰하게 집안일을 거들면서 부담 없이 맞벌이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을 해주신다. 아이들도 외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느끼는지  그만큼 잘 따른다. 4학년인 둘째 딸과는 절친처럼 좋은 것은 나누고, 자주 통화하며 마음을 헤아린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씀에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장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모님의 시간'은 없는 채로 온전히 희생하며 사셨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좀 더 표현하고 다가서야겠다.

"소녀 감성을 느끼도록 새로운 추억들도 선물해야지"


아내는 내 생일에 맞추어 필요한 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진다며 여름옷을 미리 구입했다. 차 냄새의 원인이었던 바닥 매트도 매끈하게 갈아주었다. 앞으로 더 행복한 시간을 주고 싶다며 'SUN & MOOM" 시계를 건네주었다. 드라마를 섭렵한 사람답게 문(moon), 선(sun)이라는 나의 이름처럼 살라고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나오는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는 함께 시간을 통과해 여행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이 놀라운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인용하며 축하한다며 심쿵하게 고백한다. 디자인 분야에 관심이 많은 아내는 벌써부터 역할 분담하자며 공동저자에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생각해 볼 문제야. 가능성에 베팅하는 건가"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걸 묻는다. 너희들이 주는 것은 모두 특별한 것이기에 상관없다고 했다. 생일 전날 둘째는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왕복 1시간이나 걸리는 서점을 걸어갔다. 진열된 책의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물어본 모양이다. 손편지로 전해주는 마음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읽기에 부담스러운 분량과 내용은 문제 될 건 없다.

섬세하고 따뜻한 둘째의 헤아림에 감동 백배다.

아내는 빨갛게 달아오른 둘째의 얼굴에 속상한 모양이다. "당신 생일이 뭐라고 더운데 서점까지 가서 책을 사 왔는지 모르겠다"며 책임지라 한다. 아빠 선물을 위해 한 걸음에 갔을 모습이 선하다. 오이를 썰어 듬성듬성 얼굴에 붙여주며 고마움을 전했다.

첫째는 13줄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편지와 함께 역시나 책을 선물했다. 자기 계발과 습관에 관심 있는 아빠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첫째는 작년부터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잘 이겨낼 거라 믿는다.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잘 표현도 못하고 짜증도 많이 내서 죄송했어요. 아빠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글 많이 쓰다 보면 분명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오늘의 추억들은 특별했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충만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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