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조금 다르게 해 보았습니다. 긍정? 선한 사람? 에너지를 주는 사람만 있다면 좋을까?
매일 태양이 비추면 사막이 되는 것처럼 날씨의 변화가 있어야 감사할 이유가 생깁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흉악범을 보면서 혀를 쯧쯧차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큰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 한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일은 결코 용서받기 힘듭니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는 왠지 모를 찜찜함이 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노력해도안 되는 굴레, 하루하루 살기가 고통인 사람들에게 평범한 일상은 사치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왜 저렇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마냥 비난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도 불쑥불쑥 솟아나는 욕망에 노예는 없는가?반면교사로 삼아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저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기에 매일 무릎을 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도 마음속의 악한 사람이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요. 교만은 언제나 부드러운 혀로 "세상의 중심은 너야"라고 속삭입니다. 알면 알수록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어깨에 올라타고 세상을 보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모두 은혜요,기적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미세 먼지가 있어 아름다운 석양빛이 나옵니다.
시인은 부드러운 혀와 가시돋친 혀를 절묘하게 대비시킵니다. 악마의 부드러움과 천사의 가시 돋침을 꿰뚫습니다. 짧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갈고닦으며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을까? 현실에 안주않고 스스로를 채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회는 없더라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혹은 많이 아파보니 아픔을 이해하는 넓은 가슴이 되었을까도 궁금합니다. 깊은 심연을 꾹꾹 눌러 뽑아낸 건 아닐까? 힘들어했던 고통의 결정체가 오히려 읽는 이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익숙함을 경계하며 불편함 속으로 몸을 던지는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문학을 향유한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걷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잡으며연상의 경계를 넓힙니다.
생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필요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강이 되고 바다가 됩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주문이변화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넘어 내 주변까지 바꿀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의 모멘텀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욕망과 절제 사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줄다리기합니다. 시인의 말처럼 저 또한 악마와 천사가 늘 싸우는 중입니다. 악마가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과 '실천' 아닐까요. 스스로 엄격하며 남에게는 좀 더 관대한 모습을 악마는 가장 싫어할 것 같습니다.